롤란트 슐츠의 ‘죽음의 에티켓’을 읽고
죽음, 생경함 그 자체
푸짐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온 몸으로 만족스러움을 표현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초등 5학년 딸래미가 “ 엄마아빠도 나이들면 죽게 되는거잖아?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 라면서 갑자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립니다.
우는 아이를 꼭 안고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죽게 되어 있어. 슬프고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받아들이면서 씩씩하게 살아가야 하는거야”라고 약간은 형식적이다 싶은 대답을 해주고 나니 문득 나한테도 엄마아빠가 있고 그 분들이 어딘지 모를 그 문 앞에 나보다 더 가까이 서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마고우의 부고에 울음을 삼키던 80이 다된 우리 아빠의 서글픈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말이죠..
“엄마아빠가 없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괴로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질문을 수면 위로 올려야하는 때가 왔습니다.
누구에게나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다 똑같겠지만, 저한테는 절대절명의 의지처입니다. 아이들 키워내고 살림을 도맡아하고 있는 엄마가 없다면 지금 해내고 있는 일을 절반도 못해냈을 겁니다. 밖에서 여느 남자들과 똑같이 퍼포먼스를 낼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분이 뒷배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날개를 달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엄마가 없다면 나는 어떨까라는 질문에 몸서리를 치게 되지만 이렇게 소중한 존재인 부모님도 언젠가는 내곁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면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료진과 119 소방대원, 호스피스 병동, 요양원 같은 곳에서 죽음을 일상처럼 마주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죽음이라는 테마를 조금 일찍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의 삶에는 경험으로 체화된 어느 정도의 묵직함과 진중함이 있으실 거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면서 글을 쓰는 몇몇 작가님들의 글이 그렇듯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것도 그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을 업으로 하고 살아가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응급 질환이나 치명적인 병을 볼 일이 거의 없는 진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저한테는 죽음을 눈 앞에서 마주하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4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현실적이지 않은 단어입니다. 입 밖으로 꺼내놓기 두려운 문제였고, 당면한 나의 문제가 아니였고, 나에게는 오지 않을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유아기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그른 말이 아닌거 같아요.
죽음을 준비하는 삶, 하루를 천년처럼
나는 불혹을 넘기고 인생의 중반기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에게는 죽음이라는 그 두렵고도 슬픈 이벤트는 닥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곰베르츠의 죽음의 법칙에 따르면 서른 살이 되면서부터 인간은 8년에 한번씩 바로 다음 연도에 죽을 확률이 2배로 높아진다고 합니다. 저는 이 주기를 이미 두번을 넘기고 여전히 건강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그러나 60,70까지 건재할 수 있는 운좋은 사람일지는 모를 일이죠.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만약 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해야될까라는 질문 앞에 저를 세워보았습니다.
이 고민을 해결하려고 해도 사실 눈 앞에서 타인의 죽음을 봤다거나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피부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만나게 된 책이 바로 롤란트 슐츠가 쓴 <죽음의 에티켓 >이라는 책입니다. 저와 같은 경험치때문에 사고의 한계에 갇혀 있는 분이시라면 이 책이 정말 도움이 되실겁니다.
<죽음의 에티켓>은 독자를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으로 발가벗겨서 끌어 앉힙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부터 눈을 감는 임종 후 검안을 하고 장례를 치르는 순서에 따라 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당사자의 육체적 고통, 두려움, 슬픔과 같은 심리적인 부분 뿐 아니라 주변인의 시선까지 서술하면서 속속들이 다 알려줍니다. 책을 읽는 동안 죽음을 앞둔 당사자의 마음과 고통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며, 주변인의 시선에서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할수 있도록 리얼한 판을 깔아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뭘해야 할까?
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내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가 매일 조금씩 줄어들고 있을 때 과거로 눈길을 많이 돌린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만의 용기 있는 삶을 살 걸 그랬다고 후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일만 열심히 하면서 사는게 아니었다고, 또 누군가는 여행을 더 많이 다니면 살 걸 그랬다고 각자의 과거를 섬뜩할 정도로 떠올리면서 후회를 합니다.
후회로 삶을 마무리하지 않으려면 현재, 지금 이순간에 충실한 것이 바로 답입니다. 아이와 끌어 안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는 이 순간이 소중하고, 노을지는 언덕 위에서 떨어지는 태양의 궤적을 눈에담고 있는 이 순간이 소중하고, 하고 많은 의사 중에 나와 인연이 닿은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해결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어느 하루의 일상이 소중합니다.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의 삶이 더 소중해지고,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죽어간다는 것은 삶의 일부분이고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삶이 더 소중해질 수 있습니다.
" 인간은 평생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걸 부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
준비된 죽음의 가치
최근에 상조 보험을 가입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애틋한 부모님을 염두해두고 실천에 옮긴 일이긴 하지만, 이제 인생의 절반 아니면 2/3? 어딘지 모를 그 어디 즈음에 선 제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죽음을 현실로 끌어올린 방점이 된 이벤트였습니다.
<죽음의 에티켓>에 ‘환자처분서’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는 질병으로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일 때,의사 표현을 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내 육체를 어떻게 다뤄줘야되는지에 대한 내 꼿꼿한 의지를 남겨진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일종의 계획서입니다. "살아도 산게 아닐 것 같은 상태일 때는 삶을 억지로 유지하는 연명치료는 하지않아야 한다." "장례식은 가족이 다 모여서 조용히 기도드리는 걸로 하자." "내가 좋아하는 나무 옆에 뿌려달라" 등등 요청 사항이 무엇이든 본인의 의지를 반영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죽음을 처리해야되는지를 문서화해두는 것입니다.
2014년 세상을 떠난 고 김자옥 씨가 꽃보다 누나에 출연해 크로아티아를 여행하시면서 전이된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고 고백하셨는데요. 그리고 얼마 안있다가 세상을 등지셨던 것은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 때 ‘비명횡사해 갑자기 세상을 등지는 사람에 비해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있는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립니다. 그 말을 하는 김자옥 씨의 얼굴은 너무 평온해 보였고 그저 방송용 멘트가 아니었음은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거 같아요. 참 고우셨던 분이 곱게도 세상을 떠나셨지요.
올 가을에는 부모님과 그리고 가족들과 이러한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해보려고 합니다. 아직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남아있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