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한의학, 서사의학으로서의 한의학의 가치
한의학, 어려운가요? 고리타분한가요?
여러분들은 한의학하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시나요? 어떤 분들은 음양오행(陰陽五行), 기(氣), 경락(經絡) 등 무슨 의미인지 다가오지 않는 신비롭고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을 떠올리실거고, 또 어떤 분들은 한의학은 옛날 사람들의 의학이니 고리타분하고, 비과학적이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의학은 인간의 몸을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연구한 사실에 근거해 치료를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의학입니다. 원래의 한의학의 방법론이 형이상학을 중시하는 송나라 이후의 학문 풍토때문에 변질된 부분이 많은데, 최초의 한의학은 몸에서 나타나는 질병의 패턴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치료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명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조를 반영한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의서가 바로 상한론(傷寒論)이라는 책이지요.
저는 진료를 하면서 음양오행이나 기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가능하면 현대의학적인 생리학이나 해부학적 지식에 근거해 질병의 발생 기전을 설명드립니다. 제가 약학을 전공하고 한의학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임상을 하는 의사의 언어는 의사가 아닌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쉬운 수준에서 설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음양오행과 기와 같은 용어는 아주 오랜 옛날 언어적 표현이며, 애초의 언어 쓰임과는 달리 왜곡된 부분이 있지요. 실제로 한의계에는 저와 같은 문제 인식을 가지고 이러한 체계를 만들어 가는 연구와 노력을 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2015년 최고 권위의 의학상인 노벨의학상을 북경중의학 연구소의 투유유 박사가 수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특이한 것이 생약재인 청호(개똥쑥)에서 추출한, 그것도 알코올과 같은 유기용매를 이용한 추출법이 아닌 갈홍의 도홍경이라는 고의서에 근거한 전통 한약 탕전 방식으로 유효성분을 추출해서 개발한 항말라리아제, 아르테미시닌을 개발한 업적을 인정받았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학문적 성과를 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서의학, 중의학을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통합해 학문적 성과를 이뤄낸 중국이 무척 부럽기도 했구요. 학문의 영역에서 제한도 많고 구분과 경계도 많은 한국의 의료계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던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왜 한의대를 다시 들어갔나?
제가 약사라는 커리어를 접고, 한의대에 다시 입학하게 된 사건은 약사로 일을 하면서 제가 보고 듣고 느꼈던 2년여의 경험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시대는 의약분업도 되기 전이었고, 약사가 한약을 재량껏 쓸 수 있는 약국 환경에서 약물을 복용한 뒤 나타나는 환자의 반응과 안전성 면에서 한약이 압도적으로 매력적인 약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느끼게 되었던 여러가지 사례가 있었지만 지금 가장 기억나시는 분은 남편과 사별한 후 생긴 증상으로 고통받고 있던 중년 여성입니다. 수면제없이는 한숨도 잠들 수 없고, 숨차서 몇분도 걸을 수 없었던 원인 모를 증상이 남편과 이별한 후 시작되었는데요. 일반 의원부터 종합 병원까지 다양한 의료 기간을 전전하다가 복용하게된 청심연자음 2주분에 씻은 듯이 그녀를 1년넘게 괴롭혔던 증상이 사라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약국을 찾아와 자리를 틀고 앉아서 한참 행복해하던 그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며, 현재의 의료 시스템에서 길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줄기 등불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한의학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저는 너무 자연스레 한의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사의학으로서의 한의학
한의학이 현재의 의료 시스템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의료 쳬계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감히 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태생적으로 한의학이 가지고 있는 진료방법이 한사람이 질병에 걸릴 수 밖에 없는 개개인의 스토리를 중요시하는 서사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서사의학(Narrative medicine)이라는 새로운 의학 패러다임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서사(敍事)는 어떤 사실을 이야기하듯이 기록하는 글의 양식을 말합니다. 기승전결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듯이 쓰는 글쓰기의 형식이지요.
서사의학이란 환자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질병의 원인, 진단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의학입니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이 서사의학이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랍니다. 태생부터 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 안에서 원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치료를 하는 서사적인 전통에서 시작된 의학이거든요. 오늘날 현대의학이 복잡한 진단기기에 의존한 의료 시스템으로 움직이다 보니 진료에 있어서 환자가 하는 이야기와 그들의 삶을 배제시키는 치료 시스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진단의 오류와 획일화된 기계적 의료 시스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요즘 서사의학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서사의학의 3요소
서사의학의 대표적인 권위자인 미국 컬럼비아 의대의 리타 샤론(Rita charon)박사는 서사의학의 3요소를 관심, 표현, 연대로 분류했습니다. 리타 샤론 박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는데요. 서사의학의 중요성과 방법론을 역설한 TED 강연은 환자를 매일 마주하는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명강의였습니다. 리타 샤론 박사가 말한 서사의학의 3요소인 관심, 표현, 연대를 설명드려 볼게요.
관심
환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의사가 환자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경청하며 환자의 말과 표정, 어투, 제스처 등을 그대로 흡수해서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한의학에서 문진(問診), 맥진(脈診), 시진(視診)을 행하는 과정입니다. 진료실을 들어선 환자의 걸음걸이와 자세, 환자의 얼굴색과 표정을 눈으로 관찰해서 일반적인 패턴과는 벗어난 움직임을 바탕으로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요. 증상을 묻고 약을 처방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시작(Onset time)을 묻고, 그 시기의 특징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그때 느꼈을 감정과 극복하기 위한 그 환자만의 특징적인 움직임의 패턴을 듣습니다.
표현
앞선 과정에서 들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의학적으로 가능한 반응을 찾아내기 위한 의학적인 면담을 통해 환자의상태를 의사가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의사는 질병이 오게된 과정에서 발생한 환자의 삶의 패턴을 종합해 질병의 원인과 결과를 인과적으로 엮어내는 추론의 과정을 거칩니다.
연대
환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진단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의학적 추론 과정을 통해 의사는 환자의 고통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환자의 입장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최선의 치료 방법인가를 고민하여
환자와 깊은 공감과 연대를 이루게 됩니다. 이 과정은 질병이 치료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서사의학에서 히스토리 테이킹, 즉 병력을 청취하는 일은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한의학은 이 히스토리 테이킹에서 모든 진료가 시작됩니다. 환자가 이야기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스토리에서 질병과의 연관 고리를 찾고 여기서 근거를 찾아가는 것이 한의학의 강점입니다. 그래서 의료 행위를 하는 과정에 환자가 소외되는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문제 해결에 다가서는 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의학이, 한의학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제 일이 너무 즐겁고, 그래서 너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신원장의 오늘의 성장일기였습니다^^
신정민 /전직 약사&현직 한의사
강남 참진한의원에서 난치성여드름, 여드름흉터, 주름, 안면비대칭, 턱관절장애를 진료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약물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진료현장의 경험을 담아 얼굴 건강과 관련된 지식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짬짬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