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용선씨 이약기(2)
베풀며 다시 살아가기
인터뷰가 있었던 2022년 2월, 동네 천을 따라 조용히 흐르는 산책길 옆, 공원 운동기구들이 설치된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녀는 멀리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매일 열심히 운동하고 있어. 건강을 내가 지켜야지 아프면 나만 억울해요. 집에 칩거하다, 요새는 여기서
천을 따라 산책하는데, 한 시간 이상 걷고 운동기구에서 열심히 운동하며 컨디션을 되찾았지. 이제는 매일
오전에 마스크를 쓰고 나가서 만 보 이상 걷고 운동하며 돌아와요. 이제야 진짜 내 삶을 사는 것 같아요. 아
프지도 않고, 마음도 평온하고… 남은 시간이 소중하니까요."
그녀는 매일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을 지키고, 형편이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 이웃의 어려움을 살펴 도우며 하루하루를 보람 있게 살아간다. 자신의 고통을 조용히 이겨내며, 타인의 고통 앞에 먼저 손을 내밀 줄 알게 된 사람. 용선씨의 노년은 그렇게 ‘감사의 시간’이 되었고, ‘베풂의 삶’으로 이어졌다.
"나는 신문을 보아도 누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돕는가를 보게 돼요. 지난번에도 행상하며 몇억씩 기부하는
할머니를 신문에서 보고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정말 대단하다 생각했지. 엊그제도 자식이 젊어서 죽었는
데 장기기증을 하게 하고 해마다 아들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한다는 기사를 보며 그 정신이 대단한 거야. 나
도 사는 동안은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나누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후원도 하고 실천하고 있
어요."
죽음을 준비하는 삶: 화해와 용서
그녀는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살아왔다. 궁핍한 시절을 지나며 몸에 밴 절제와 검소함은 그녀의 생활 철학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경제관과 다른 자녀들의 태도는 때로 실망스러웠다. 소소한 경제적 문제로 불거진 갈등은 마음에 작은 금을 남겼고, 어느 순간 자녀들이 점점 자신과 거리를 두는 듯한 느낌에 서운함이 쌓여갔다. 한때는 자신을 외면한 자녀들에게 유산을 남기는 것이 아깝게 여겨지기도 해서, ‘왜 줘야 하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결국 돈 앞에서 내 마음이 무너지는구나…’ 가끔은 그런 자책이 마음 한편을 스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생각이 달라졌다.
“죽으면 결국 자식에게 가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그녀는 결국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금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노년에 이르러 죽음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남은 재산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자녀들과의 갈등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화해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자식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그들이 잘 크고 잘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재산은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길에서, 그녀에게 남은 재산은 더 이상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떠나는 마음의 선물이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정리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남겨질 이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는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갈등도,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자녀인걸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되는 그날까지, 그녀는 화해와 용서의 마음으로 삶의 마무리를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있다.
"때로는 자식들이 섭섭하고 억울하기도 해요. 내가 이렇게 아껴서 남기면 뭐 해, 그렇다고 안 줄 수도 없
고.... (중략) 돌아보면 그래도 잘 살았구나, 나 자신이 대견하죠. 젊어서 암으로 죽는다 할 때 자식이 그리
눈에 밟혔는데.... 자식들이 나를 살게 한 거는 맞아요. 그냥 (내 말을) 인정하고 받아주기를 바랐는데, 이젠
그것조차도 내려놓아야겠지요."
그녀는 자녀들과 화해하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다시 잘 지낼 수 있게 되자 자신의 일상에 몰두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여러 차례 인터뷰 진행 과정 중에 용선씨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주위 사람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돕듯이, 앞으로 자녀들에게도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녀에게 남기고 싶은 삶의 교훈
그녀는 요즘 자주 옛 생각에 잠긴다. 남편과 함께했던 젊은 날, 두 자녀를 품에 안고 살아온 지난 세월, 죽음을 넘나들며 버텨낸 시간들…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순간마다 단단한 결심과 절박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열심히 근검절약하며 살아낸 것만으로도 참 잘했지.’
문득 혼잣말처럼 새어 나오는 말이다. 이제는 자녀들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품어온 말을 꺼내놓고 싶다. 그것은 돈이나 유산보다 더 소중한, 삶의 태도와 철학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녀들에게 바라는 건 크지 않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으니,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남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때로는 남을 살필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다.
'내가 사는 동안 때로는 많이 힘들어도, 절망에 머물진 않았단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길은 있었다.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내가 너희에게 물려주고 싶은 삶의 방식이
야.'
'근검절약하여 남한테 베풀고 사는 것, 그게 내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말이었고, 내가 평생 지키려 했던 삶
의 좌표였단다.'
그녀는 종종 자녀들에게 부치지 못한 마음의 편지를 썼다. 전하지 못하더라도, 그 마음만큼은 삶의 무늬처럼 남겨지고 싶었다. 언젠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녀들이 자신이 남긴 말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이 자녀들의 마음속에 조용히 자리 잡아, 혼란스러울 때마다 삶의 나침반이 되어 주길 바랐다.
'살다 보면 뜻대로 안 되는 날도 많을 거야. 감당하기 어려운 일도 많지. 그럴 땐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바라는 거야.'
'엄마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로 다 전하진 못하겠지만, 너희가 스스로 사랑하고, 자기 삶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구나. 그것이 내가 살아서 보여주고 싶었던 삶의 방식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