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여든 이후, 삶이 이야기가 되다

5. 의미를 향한 질문 – 영미씨(1)

by 유정인



“비행 청소년은 그냥 상담만이 아니고, 함께 지내는 시간도 필요해요. 그들이 사회에 환원한 후에도 엄마가 되어 그 삶을 이끌어 주었어요.” -영미씨, 85세-


2022년의 어느 봄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인터뷰라는 이름으로 마주 앉았지만, 오랜 친구처럼 반가웠다. 그녀는 서른 해 전 신앙 안에서 맺은 ‘봉사’라는 서원을 여전히 껴안고 있었고, 그 결심은 세월을 견디며 더욱 단단히 빛나고 있었다. 노인복지관에서 또래상담사로 보낸 10여 년의 시간은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삶과 사랑의 기록이었다.


신앙생활


그 무렵, 부부 사이의 갈등도 거듭되며 집 안 붕위기는 날이 갈수록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남편은 어딘가에 기댈 곳을 찾듯 처음으로 교회의 문을 열었다. 예배실 한 켠에서, 그는 오래 묵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영미 씨는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처음엔 의아해했고, `과연 이 길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일까?'를 고심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마음이 편해졌다.”라는 대답을 듣던 그 날, 그녀도 그 무언가에 이끌리듯 조용히 따라나섰다.

처음 드린 예배는 낯설고 몸은 불편했지만, 남편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작은 위안을 느꼈다. 그 순간은 어쩌면 잃어버렸던 ‘함께’라는 단어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영미씨에게도 깊은 변화의 순간이 다가왔다. 뜻밖의 깨달음처럼, 그녀의 마음 한켠에 믿음의 씨앗이 떨어졌다.

그리고 기적처럼 찾아온 45세의 어느 날-오래 앓던 몸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영미씨는 그날의 사건을 “기적”이라 불렀고, 그 은혜를 결코 간직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받은 은총을 나누며 살아가리라’-그녀의 가슴에 새로운 서약이 새겨졌다. 그리하여 그녀의 봉사는 병원을 향해 걸음을 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막 개설된 S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 삶의 마지막 시간을 견디는 이들과 가족 곁에 머물며, 그녀는 말 없는 위로와 함께 손을 맞잡았다. 누군가 삶의 마지막 불꽃이 꺼져가는 그 시간에, 품은 온기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받은 사랑을, 다시 사랑으로 건네리라”-그녀의 신앙 여정은 그렇게 누군가의 마지막 길에 빛이 되어 피어났다.


상담 공부하며 새로운 역할을 시작하다


영미씨는 젊은 시절, 초급 대학을 졸업하며 마음 한켠에 미처 채우지 못한 배움의 갈망이 있었다. 경제적 형편이 허락했다면, 그림을 그리며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 꿈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취업 후에도 야간 대학에 다니며 지식을 쌓았지만, 마음에는 늘 ‘더 배우고 싶은 목마름’이 자리했다. 막내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녀 뒷바라지가 마무리되던 50세 무렵. 영미씨는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내면의 물음을 마주했다. “이제,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신문을 펼치던 어느 날, 우연히 눈에 들어온 Y대학 신학원의 작은 광고는 그녀의 걸음을 다시 배움의 길로 이끌었다.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상담학이 마음을 끌었지만, 되돌아보니 이 선택 덕분에 봉사의 길이 열렸고, 부부 관계의 소원함을 풀어 주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에게 이 선택은 마치 신의 이끄심처럼 느껴졌다.


영미씨의 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온화한 분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집안에 분란이 일어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남편을 존중하고, 여자는 집안에서 큰소리 내지 말아야 한다.’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자기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결혼은 그녀가 그리던 평온한 물빛과는 조금 다른 결을 띠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부의 대화는 점차 날카로운 침묵으로 채워졌고, 남편은 사소한 일에도 언성을 높이거나 면박을 주곤 했다. 당황한 그녀는 그때마다 입을 다물고 침묵의 뒤편에 숨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마음의 균열은 어느새 부부 사이에 깊은 틈을 만들었다.


되돌아보면, 영미씨는 자신을 늘 온순하고 순종적인 아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녀는 분명한 주관을 가진 사람이었고, 잘못된 점을 보면 지적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결도 지니고 있었다. 결혼 전에, 남편에게 "대학에 진학하라"고 권했던 일도 그 성향의 한 면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상대의 자존심을 뒤흔들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녀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앞서서 이끌려 했던 방식은, 가부장적 틀 안에서 자라온 남편에게는 불편함과 위협으로 느껴졌다는 것을. 두 사람이 살아온 문화와 마음의 풍경은 다르게 채색되어 있었으며, 서로 알지 못한 채 그 위에 관계의 그림을 그리려 했었다.


영미씨에게 중년기는 가정의 주부 역할과 학업을 병행하며 가장 바쁘게 살아야 하는 시기였다. 상담 공부하면서 그녀는 점차 남편을 이해하게 되었고, 부부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녀는 가정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가사, 학업, 나아가 봉사활동까지 능숙하게 조율하며 생활하였다. 어느 날, 모 일간지에서 E여자대학에서 진행하는 ‘약물남용 과정’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영미씨는 자신의 건강을 챙기고자, 허약한 몸을 보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등록했다. 막상 수업에 들어가 보니, 이는 국내에서 처음 시작된 약물중독 치료 과정이었고, 교수, 목사 등 전문직 수강생이 대부분이었으며 일반인은 드물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주위의 권유로 1년간 수강을 마쳤고, 이 과정은 그녀가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법무부 산하에 보호관찰소가 있어요. 비행 청소년들을 보호하고 성인들도 재소 후 나오면 보호하

고. 그 당시 약물남용 청소년이 많았어요. 본드도 하고, 걔네들을 보호하는 센터가 생겼어요. 그것이 미국

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거지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더라고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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