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여든 이후, 삶이 이야기가 되다

6. 죽음 앞에서 삶을 품다 – 정자씨(1)

by 유정인

“나도 세상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시신, 장기기증이었는데, 병이

있는 사람은 안된다 해서 실망했어요. 다행히 뇌 기증은 연구에 필요하다고 해서 기증했는데 치매 연구

에 도움이 된다니까 작은 보답을 한 거라 보람을 느껴요.” -정자씨, 83세-


정자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20년 초여름이었다. 그녀는 ‘죽음을 잘 준비하고 싶다’라는 주제로 K도 가족상담소에 심리상담을 신청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리의 만남은 비대면으로 이루어졌다.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형성되었다. 우리는 함께 장례 절차와 지역 기관의 연계 방법을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A시에는 가까운 곳에 화장터와 장례식장이 있었고, 최상위 돌봄 대상자인 그녀는 장례비 보조도 받을 수 있었다. 정보를 하나씩 확인해나가며, 그녀는 조금은 안도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장례의 절차를 정리하는 일뿐 아니라, 마지막을 존엄하게(dignified) 지켜주려는 그녀의 마음이 드러났다.

상담을 신청하기 몇 달 전, 그녀는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는 일을 겪었다. 119에 연락해 응급실로 이송하기 전, 의식을 잃은 남편의 몸에서 흘러나온 대변을 처리하기 위해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남편을 화장실로 끌고 갔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왜소한 그녀에게 벅찼지만, 남편의 존엄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남편은 이미 방광암 치료를 받은 지 11년이 지났고, 4년 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받은 뒤 자주 어지럼증으로 넘어졌다.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걷는 상황이었다. 사실 정자씨 또한 환자였다. 혈액암 말기로 매달 항암치료를 받는 몸이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곁에서 묵묵히 간병인의 역할을 이어갔다. 그녀가 한 달에 한 번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할 때면, 나는 병실로 찾아가 그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체구에 단정한 모습, 그리고 삶을 성실히 마주하는 태도에서 나는 수행자를 연상케 하는 경건함을 느끼곤 했다.

(그녀와 인터뷰하던 병원 4층 정원. 창경궁과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노부부 모두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었고, 자녀도 없어 의지할 곳은 거의 없었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A시의 작은 임대아파트에 살며 복지사의 돌봄과 지원이 전부였다. 남편은 신장 기능까지 나빠져 늘 몸이 부어있었고, 의사는 “다시 쓰러지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뒤, 정자씨는 남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여 자는 중에 남편이 숨을 거두지는 않을까 늘 확인했고, 갑작스러운 임종이 닥쳤을 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불안해했다. 그녀는 남편의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키고, 장례까지 치른 뒤 자신도 그 길을 따라가고 싶다고 말했다.


스웨덴의 노년학자 라르스 토른스탐(Lars Tornstam)은 1980년대 노인을 연구하면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신체의 기능이 약해지고, 소중한 관계와 익숙한 환경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상황 속에서도 노인들이 놀라울 정도로 깊은 만족과 평온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노년 초월(Gerotranscen -dence)’이라 불렀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점차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물질적 집착을 내려놓고, 삶을 보다 큰 맥락,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더 큰 전체 중의 일부임을 깨닫고, 존재의 또 다른 차원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는 이것을 인생의 진정한 절정기로 설명했다.

정자씨의 삶은 바로 이 ‘노년 초월’의 실례와 같았다. 늙고 병들어, 자녀도 없이 가난한 채 살아가는 말년이 끔찍한 재앙만은 아니라는 것을 정자씨는 몸소 보여주었다. 그녀는 남편과 자신을 의연하게 돌보며 죽음을 준비했다. 여든을 넘어선 그녀는 흔히 노년이라 하면 떠올리는 무력감과 좌절이 아니라, 삶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또 다른 깊이를 드러내고 있었다.그녀는 병든 몸으로 남편을 돌보면서도 불평이나 원망 대신 담담한 수용과 준비의 태도를 보였다. 물질적 결핍이나 사회적 고립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상은 작은 의식처럼 성실히 이어졌다. 죽음을 두려움으로만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존엄을 지키려는 의지와 내면의 평온을 키워가는 것- 것이야말로 노년의 또 다른 성취였다.


노년기의 진정한 과제는 단순히 신체적 건강을 지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상실의 한가운데서도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연결, 그리고 내면의 고요함을 어떻게 회복하고 유지하느냐이다. 배우자의 죽음, 건강의 악화, 사회적 역할의 변화 같은 여러 상실 앞에서,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고통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고 그것을 해석하느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야말로 성공적인 노화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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