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끈 풀린 작은 토끼

영화 <조조래빗>_리무 고도근시안경

by 리무

영화 <스틸 라이프>(지아장커, 2006) 리뷰

자유는 마치 어린아이 같다.


폴짝폴짝 뛰어도 되고, 살랑살랑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춰도 되고, 입고픈 옷도 마음껏 꺼내 입어도 된다.

슬프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도 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가벼운 손 키스를 날려도 된다.

또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단호히 말해도 된다.


그 모든 것이 그리해도 괜찮고,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다.


10살 어린아이 조조는 그런 자유를 스스로 박탈했다. 시대가 그러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조조는 상상 속 친구 히틀러를 항상 곁에 두며 스스로 자유를 감시한다.



엘사는 어린이와 성숙함 사이의 줄에 아슬아슬하게도 걸터앉아 있는 어른아이다. 소녀는 조조의 집 벽장 속에 숨어 매 순간 과거를 갈망한다.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려움보다 체념의 색이 더 짙다. 그건 아마 제 나이 속도에 맞지 않게 너무 일찍 마음이 성숙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자유를 억압당하는데 무뎌져 버린 어른들처럼.


그런 엘사의 여린 면을 오로지 살펴볼 수 있는 건 바깥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어른, 조조의 엄마,

로지 하나뿐이다. 로지는 엘사를 바라보며 자신이 허망하게 떠나보내야만 했던 어린 딸의 잔상을 보듬어

준다.


유대인 사냥에 혈안이 된 이 세상 속에서 딸의 방 벽장에 몰래 숨겨둔 엘사에게 로지는 딸이 누리지 못했던 자유로운 삶이란 선물을 언젠가 찾아올 자유의 날, 붉은 리본을 단단히 묶어 소녀의 옆구리에 슬쩍 챙겨 보내리라 매 순간 다짐했을 것이다.


이처럼 자유를 간절히 희망하는 사람은 어쩌면 로지일지도 모른다.


자유애(愛)가 넘쳐 조조를 방임하는 것일까 싶겠지만,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존재들을 2명이나 가슴 한편에 묻어두었다. 나머지 한편에는 조조가 마음껏 드나들 수 있도록 자물쇠 열쇠를 잠시 남편 군복 주머니 안쪽에 깊이 집어넣었다. 자유를 억압하는 세상 속에 어린 조조마저도 자신의 품속에 가두는 건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경험하라.
오직 나아가라.
감정에는 이르지 못하는 먼 곳이란 없으니.

릴케의 시 한 구절처럼 로지는 조조가 그냥 나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다만 구두끈 묶는 법도 모르면서 저 십 리 밖까지 행군했다가 발이 꼬여 넘어져 작은 토끼의 하얀 뺨에 생채기가 나길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다면 그저 자신의 품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게 뻔하다.


온전히 스스로 구두끈 묶는 법을 깨우친다면 혹여 넘어지더라도 툭툭 먼지를 털고, 구두끈을 두어 번 질끈 묶어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녀는 조조가 스스로 깨우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로지는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구두끈을 어떻게 묶고, 어떤 걸음으로, 어느 방향으로 세상을 향해 내달리는지. 그녀는 토끼 같은 뜀박질로 거리를 동분서주한다.

토끼가 한겨울 숲을 깡충깡충 뛰어다니면 결국 사냥꾼에게 들키고 마는 법. 로지는 그만 들켜버리고 만다. 언제나 먼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풀어진 구두끈을 묶어주던 엄마가 자신의 눈높이에 구두끈이 길게 풀어진 채 있는 모습을 마주하며 그제야 조조는 제 나이에 맞는 울음을 와르르 내뱉는다. 그저 엉엉

울다 주저앉는다.


조조는 엄마를 향한 마지막 선물로 엄마의 차가운 구두 위에 한 쌍의 나비를 정성스럽게 달아준다.


누끼_나비.png

“엄마가 알려준 자유와 사랑의 모양새를 항상 기억할게요. 그거 아세요? 사실 제 뱃속에는 엄마 몰래

나비들이 잔뜩 피어나고 있었어요. 그중 나비 한 쌍을 엄마의 구두 위에 곱게 달아드릴게요. 이만 훨훨 날아가세요. 안녕, 엄마. 안녕, 로지.”


나머지 나비들은 모두 모아 사랑하는 소녀의 무거운 구두에 잔뜩 달아주자. 그중 한두 쌍은 나의 구두에도 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비 날갯짓으로 그녀마저 나를 떠나버리면 어떡하지? 그러나 아름다운 나비 구두를 신은 그녀는 내가 본 어떤 모습보다도 생기가 넘치고, 원래 제 것인 듯 무척 잘 어울린다. 그 둘은 한결 가벼워진

구두를 신은 채로 문을 열고 날아가 살랑살랑 춤을 춘다.


소년은 처음에 허우적댔지만, 점차 자유로움에 익숙해진다. 춤출 때 스텝 밟는 법도 알았고, 착지하는 법도 알았고, 구두끈을 단단히 묶는 법도 알았으며, 발끝에 힘을 주어 원하는 방향으로 달려가는 법도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친구보단 귀찮은 애송이 같은 히틀러를 발로 뻥 차버리는 법도 알았다.


소년은 자라났다. 자라난 소년은 어디로 나아갔을까? 아직 완전하진 않은 이 소년의 방향에 그리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엄마 로지의 바람대로 구두끈 묶는 법을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냥꾼이 사라지고 어느새 봄이 찾아온 숲 속을 깡충깡충 내달릴 조조와 엘사. 들숨과 날숨으로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된 소년,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순간 고개를 숙여 나의 구두끈은 어떠한 모양새인지 살펴보게 된다. 묶는 법은 알고 있지만 방치되진 않았나? 그렇다면 재빨리 꽉 조여 매자. 그새 두 토끼는 저 멀리 점이 될 것만 같다.


애가 타 두근두근 대는 가슴은 그들과 함께 팔딱팔딱 뛰는 마음으로.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킨 자유의 바람을 흠뻑 들이마셔 한없이 부푼 마음으로.

유남생의 창작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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