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집 막내
형제 모두 육십을 한참 넘기었으니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해 봐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sns를 주고받으며 깔깔 거리기도 하고 혼자 눈물 콧물 빼며 청승떨기도 한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고 이제 우리 넷만 남았다. 언제인가는 셋, 둘, 하나가 되리라.
더욱 외로울 때가 오기 전 우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우리 형제는 56년생, 58년생, 61년생 그리고 막내인 내가 64년생이다.
사실 이번 생의 예정에 없던 나는 59년생의 오빠가 어릴 적 세상을 떠나서 태어났다.
내 생일이 생긴 연유를 알고부터 나는 그 대신, 그 몫이라는 우울한 바닥을 밟고 서 있는지도 모른다.
시골 우리 집은 ○○5번 집으로 근방에 유명하였다고 한다. 전국으로 쌀을 배달해 주는 도매상! 가난한 아빠, 엄마는 쌀집으로 몇 년 만에 돈을 포대에 담아서 세었다고 하였으니, 소원대로 부자가 되었다.
시골에서 살던 7년, 나의 기억은 많지 않다.
이모들이 사람구실 못할 거라고 말할 만큼 나는 병치레가 일상이었다.
언니와 둘째 오빠가 건넌방에 촛불 켜고 기도하다 불날 뻔한 일을 말할 때는 웃는데 눈물이 났다.
나는 그 기도 덕분에 건강한 걸까!
일곱 살에 학교를 보냈는데 못 가는 날이 더 많은 와중에 소풍 가겠다고 떼쓰다 집 앞에서 엄마한테 낚아 채인 그 순간은 기억한다.
쑤욱 들어 올려지던 순간 발버둥 치며 울었을 내게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기억이란 것은 마법 같은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 장소, 그 시간이 된다.
시골집 마당 어디엔가 쪼그리고 앉아 오빠들이 구워주던 개구리 다리.
눈알이 빙글 벵글 돌던 두꺼운 안경 쓴 서기아저씨가 가게 옆 사무실에서 구워주던 참새.
오빠들을 따라갔던 논이었던가? 한 무더기 돌을 치우니 긴 것이 구불구불 있어서 기함했던 순간.
그 뒤로 긴 것은 너무너무 무섭고 싫다.
부모님 산소에 갈 때 언니는 운전하면서도 우리 집 자리, 창고 자리, 마당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어준다.
언니는 그래봐야 나보다 세 살 먼저인데 기억하는 게 많다.
일찍 세상을 뜬 큰 이모, 엄마의 언니 집까지 기억하며 딸만 내리 낳았다던가? 시집살이가 고되었던 큰 이모 얘기, 그 동갑내기 외종사촌이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들을 했다.
나는 그 집 앵두나무를 기억한다.
그때는 앵두가 참 맛있었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 맛을 찾을 수 없다.
다리를 흔들거리며 대접에 담긴 앵두를 한 알 한 알 소중하게 먹었음이 분명하다.
큰 이모와 달리 우리 엄마는 아들도 셋이나 연이어 낳고 돈도 잘 버는 억척빼기였다.
미인인 데다 셈도 빠르고 부지런하기가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
특히 우리 엄마의 밥은 꿀밥이었다.
아빠 친구분들, 오빠 친구들, 내 친구들 모두 모두 우리 엄마 밥을 참 많이 먹었다.
그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누군가 그랬다.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은 복 받는 일이라고.
우리 엄마는 복을 받았을까.
모든 기억은 삭제되고 먼 기억에 떠다니던 순간들이 갑자기 눈앞으로 쑥___ 나타나는 기억이 있다.
피가 줄줄 흐르던 엄마의 손.
다친 엄마를 보며 느꼈던 공포감은 그렇게 자리 잡고 있었나 봐...
쌀집에 떡방앗간까지 야무지게 꾸려간 엄마는
살려고 몹시도 발버둥 치며 살았던 그 시대의 한 사람이었으며, 시절의 맏며느리답게 아버지의 형제들까지, 그 가정까지 보살펴야 하는 고된 삶이었다.
앞집 누구네하고 못 놀게 했어. 엄마가!
우리 형제끼리만 놀라고 했어.
싸우면 우리가 얻어맞으니까...
아들 셋이 누구네 형제하고 싸워서 맞는 것을 보느니 못 놀게 한 엄마의 속이 찬 마음의 형태를 보는 듯하다.
첫째는 기관지가 약한 데다, 코피도 잘 쏟고,
둘째는 장난치고 도망 잘 가는,
셋째는 유독 아빠를 많이 닮았지...
아버지가 매를 들면 큰 놈은 끝까지 그 매를 다 받아내고, 작은놈은 도망가서 아버지 화가 가라앉으면 보이더라.
한 세상이 그렇게 갔다.
첫째 오빠는 몇 년 전 심장판막 수술을 하고,
둘째 오빠는 일 년 전 암 수술을 했다.
우리의 또 한 세상은 그렇게 지나갔으며 지나고 있다.
서럽냐고?
체념과 감사가 잘 섞이면 살만하다.
다만, 차분한 명랑함을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아, 그리운 시절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