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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Apr 05. 2020

절망의 끝에서는 새로운 길이 보이나

우리의 기억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알고보면 우리의 기억은 참으로 왜곡되기가 쉬워서 그 진상을 알아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한 것 같다. 기록은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에 해당하니까 말이다. 


우연히 오래 전에 내가 보냈던 메일을 쭉 읽어보다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걸쳐서 내가 써왔던 모든 메일들을 전부 읽어보게 되었다. 친구들에게 보내던 장난스러운 편지들, 담임 선생님들께 보내던 애정어린 편지들, 과학 발표 자료들과 여러 공모전에 지원했던 글들을 읽어보면서, 어린 내가 내가 기억하던 나와 사뭇 달라서, 지금의 시각으로 돌이켜보는 내가 참 생경해서 이 글을 적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 내가 참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는데, 편지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나는 내가 잘한 일에 대해서 뽐내는 것도 좋아하고, 할 말은 꼭 하는 꽤 당찬 아이였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에게 애교섞인 말도 부끄럼없이 잘도 하는 아이였다. 

지금의 나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지만, 어린 나이이기에 할 수 있던 말과 행동들도 보여서 내가 나를 보는 거지만 참 귀여웠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여서 참 대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것이 느껴져서 한편으로 감사했고, 뭉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은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서 놀랍기도 했다. 흔히 사람들은 잘 하는 일, 좋아하는 일, 해야하는 일 사이에서 고민을 한다고 한다. 이 세가지 일이 모두 도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 각자가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선택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세가지 '일'의 선택에 대해서, '모두'를 택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것이고, 그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 일은 내가 해야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가장 행복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큰 틀에서 나는 매우 그러하다. 


나는 꽤 철이 든 후에야 과학을 하고, 그 과학적인 내용을 말하고 전달하는 것을 즐겨하게 된 줄 알았다. 글쓰는 것도 어느정도 철이 든 후에야 내가 글쓰는 걸 좋아하게 된 줄 알았다. 그런데 기억도 까마득한 초 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지구온난화에 대해 발표를 했고, 생물 다양성에 대해 발표를 했다! 이런 저런 신변잡기적인 글들로 글쓰기 대회도 나가고는 했고,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의견을 쓰는 글을 적기도 했다. 

세상에나 과학적인 부분은 큰 틀에서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연구와도 맞닿아 있었다! 어찌보면 나는 참으로 뚝심있는 아이였고, 하고 싶은 일은 쉬이 마음을 바꾸지 않고 묵묵히 해나가는 아이였는 것 같다. 


글을 쓰는 것도 굉장히 어릴 떄 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 사실 초등학교 때 동네 친구들 몇명과 함께 글쓰기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개요를 작성하고, 글을 짜임새 있게, 가독성 좋게 쓰는 것에 대해서 조금 힘들어 하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때처럼 철저하게 개요를 쓰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도 완성된 글을 서로 읽어주고 하는 과정은 늘 행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좋았던 기억들이 지금 나로 하여금 글 쓰는 일에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재의 나를 미래의 내가 돌이켜 보겠지. 그 때 미래의 나도, 픽 웃으면서 그때 되게 귀여웠네, 열심히 살았네. 등의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나처럼. 


현실은 때로는 너무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주변의 상황이나 나의 상황에 대해서 나중에는 별 일 아니었다고 회고할지라도, 현재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에는 그 상황을 굉장히 크게 받아들이고는 한다. 지금의 나에게도 개인적인 고민과, 환경적인 고민들이 머릿 속을 가득 채우고 있고 이 때문에 때로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속을 끓이느라 머리가 아프고 몸이 아프기도 하다. 




모두에게 공감을 받을만한 현실의 고통은 '코로나'일 것이다. 좀더 구체화하면, 코로나가 야기하는 '불안증'이 아닐까 싶다. 다들 정말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들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감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날씨도 정말 좋다. 거리는 분홍색, 연두색 빛의 파스텔 톤으로 너무 아름답고 꽃비가 내릴때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이 글을 쓰면서 잠시 거리의 전경을 그려보았는데 너무 꽃놀이를 가고싶다. 꽃놀이를 간다고 하더라도 만약 옆에서 같이 꽃을 보는 사람들이 행여나 기침을 심하게 하거나 마스크를 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몹시 불안해질 것이다. 

지금은 무얼 하든, 어떠한 선택을 하든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불안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언제쯤 이 불안이 해결될 수 있을지 여러 뉴스와 자료를 찾아보면 암담하기까지 하다. 의료진들, 자영업자들, 학생들, 직장인들 등 개개인들의 상황과 여건이 모두 이해가 간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모두 포기해 가면서도 바이러스의 종식을 위해 노력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프고, 마음이 아프고, 현실감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와 말도 안되는 꿈을 꿨어,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있었다니까?라고 말할 것만 같은, 그런 나날들을 우리는 지금 살아간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에게 영혼을 빼앗겨버리면 안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에게 들을 빼앗겼다. 그리고 계절적으로 '봄'은 어느새 우리의 일상으로 성큼 다가와버렸다. 찬 기운이 가득하던 공기는 어느새 따뜻하고 포근하고 가볍기만 하다. 그 공기를 따라 마음도 두둥실 떠오르기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봄'은 실은 빼앗긴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불안을 품고 있는 한, 우리의 마음에 완전한 봄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이 시기도 추억하며 지나갈 수 있기를. 


사실 굉장히 힘들고 아픈 상황임은 사실이지만, 너무 답답한 나날들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잘 이겨내기를. 

혼란한 상황속에 매몰되어버리지 않고, 왜곡되어버리지 않고, 스스로를 잘 지켜 나가기를. 



빼앗긴 들이지만 봄은 언젠가 반드시 올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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