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밤 자전거와 Y

노래를 듣다 네 생각이 났어

by 김애정


모처럼 아무런 일 없는 주말이었다. 띠링-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막내딸, 콩나물이랑 가지 가져다 먹어.’ 사실 지금 냉장고가 꽤나 두둑한 상태라서 콩나물도, 가지도 없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잠깐 엄마아빠 얼굴이라도 볼까 싶어 답장을 한다. ‘알겠어, 이따 자전거 타고 갈게.’


자전거 타면 10분이면 가는 거리인데,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늘어져서 계속 가는 시간을 미루다 미루다 엄마한테 또 문자가 온다. ‘언제 와?’ 시간을 보니 9시. 엄마도 슬슬 졸린 시간이다. 정신 차리고 바로 옷을 대충 갈아입고 집으로 간다. 자전거 타기에 너무 시원한 여름밤이다. 콩나물과 가지를 가져가라던 엄마는 콩나물, 가지, 참외 3개, 애호박, 두부, 파김치까지 두둑이 챙겨주고 나서도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묻는다. 여기서 더 담았다가는 자전거 앞 바구니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아 충분하다고 손사래를 친다. 밖으로 나오니 다시 시원한 공기, 그냥 집으로 가기엔 아쉬워 동네 천으로 빠져서 자전거를 좀 타다 들어가야지 마음을 먹는다.

요즘 나름 ‘디지털 귀톡스’를 하는 중이었다. 평소 걸으면서, 달리면서 팟캐스트를 많이 듣곤 하였는데, 얼마 전 문득 너무 매 순간 소리에 노출되어 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어폰을 뺀다고 소리가 안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주변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어쩌다 들리는 새소리도 좋았고, 바람도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오랜만에 이어폰을 꺼낸다. 왜냐면 자전거 탈 때 노래를 들어주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소 팟캐스트는 즐겨 들어도, 음악어플을 워낙 오랜만에 켜서 뭘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제일 최근에 들었던 음악은 별로 끌리지가 않고… 그러닥 갑자기 잔나비가 생각났다. 잔나비앨범은 내가 2019년 무렵 즐겨 듣던 음악이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며 핸드폰에서 랜덤으로 흘러나오는 잔나비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2019년, 잠깐 만났던 Y가 생각이 난 것이다.


그와 처음 만난 건 위스키 원데이 클래스에서였다. 지금이라면 절대 안 갈 모임이지만, 친구의 제안에 ‘한 번 가볼까?’라는 생각정도는 들 때였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저녁 7시 즈음, 강남의 어딘가에서 위스키 클래스는 시작됐다. 평범한 건물이었지만, 내부는 꽤나 화려하고 넓은 곳이었다. 호스트가 자기소개를 하고, 7-8병 정도의 위스키를 줄 세워놓고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설명이 끝나면 각자 제일 먼저 마셔보고 싶은 위스키를 선택하셔서 테이블에 앉으시면 돼요. 같은 테이블에 앉으신 분 들끼리 함께 하시고, 나중에는 자유롭게 이동하시면서 다른 테이블 위스키 얻어마시시면(?) 됩니다.” 내가 가장 흥미가 갔던 건 ‘달모어’라는 위스키였다. 당시 설명이나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과 병에 사슴문양이 있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이런 모임에 더 이상 가지 않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위스키에 관심이 없고, 위스키를 떠나서 이렇게 ‘만남’을 목적으로 오는 뻔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곳에 관심이 없고, 이렇게 남성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 이제는 불편하다. 그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는데도, 불쾌한 상황은 역시나 발생하였다. 처음에 같은 테이블에서 시작했던 한 남성은 위스키에 대해 꽤나 아는 척을 시작으로 상당히 많은 양의 위스키를, 상당히 빠르게 마시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그분은 벌써 취기가 돌아서 다른 테이블을 돌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 중 한 분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데서 취하면 진짜 웃긴 건데”. 나는 대답했다. “그러니까요-!”


그런데 나는 그날 위스키를 제대로 마셔보는 게 처음이었다. 독한 술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독한 술 인지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10분 전 만해도 멀쩡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훅- 취기가 올라왔다. 정신 좀 차려야겠다 싶어서 잠시 나와 화장실을 갔다. 뒤로 어떤 남자가 따라 나왔다. (무서운 상황 아님. 이제는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게 무서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 남자가 바로 Y였다. 그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서운 상황 아님.) 사실 처음에 달모어 마시고 싶다고 손 드셨을 때, 같이 마시고 싶어서 따라서 손 들었거든요. 근데 제가 가위바위보 져서 같이 못 마셨어요.”라고 약간은 수줍게 말하는 그가 좀 귀여워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번호를 교환했다.


여기까지가 그날의 나의 기억이다. 좀 더 기억해보자면,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몇 잔 마셨는데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이런 곳’에서 취하는 ‘웃긴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기억은 친구가 나를 택시에 밀어 넣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친구에게 질질 끌려서 택시에 구겨 넣어진 흑역사가 더 머리 아픈 기억이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어제 취한 것 같던데, 잘 들어갔어요?’


아.. 그도 나의 취한 모습을 봤구나.. 그냥 이대로 답장하지 말아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나는 결국 답장을 하고, 일주일뒤 우리 동네에서 그와 다시 만났다. 그는 흔치 않은 ‘감수성’이라는 것을 가진 남성이었다. 우리는 즐겨 읽었던 책을 서로 추천해주기도 했고, 그는 나에게 ‘치즈’ 노래를 좋아한다며 좋아하는 곡들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때 출근길에 치즈노래를 자주 들었고, 발걸음을 살짝 통통거리며 걸어 다녔던 것 같다. 내가 그때 그에게 추천해 주었던 곡이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이라는 노래이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잔나비의 2집 앨범이 나와서 우리는 각자 다른 장소에서 같은 노래를 즐겨 듣고는 ‘이 노래 좋다.’. ‘이 노래도 좋다.’ 하며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한때는 나의 발을 통통거리게 할 만큼 좋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저 한 여름밤에 자전거를 타며 회상하기에나 좋은 상대였던 것이다. 그렇게 짧은 과거로의 여행을 마치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엄마가 싸준 과일, 야채를 냉장고에 넣는다. 그런데 분명 “가지 몇 개 줄까?”라는 물음에 “한 개”라고 대답을 했다가, “가지 많아. 유튜브 보니까 쪄먹기도 하던데, 금방 먹어~”라고 말하는 엄마에게 “그럼 한 개 더 줘.”라고 하였는데, 집에 와서 보니 가지가 5개가 담겨있다. 지금 나에게는 가지 5개를 담아주는 사랑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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