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극복하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입추가 지나고 선선한 바람에 모기도 입이 삐뚤어지기 시작한다는 처서가 코앞이다. 이런 여름과 가을의 중간에, 마지막 여름을 보내러 강릉에 다녀왔다. 8월 중순이니 그래도 여름의 한가운데가 아닐까 했는데, 마침 해수욕장은 그 주까지만 운영을 하고 폐장을 한다고 하니 정말 여름의 마지막이 실감이 났다. 파라솔, 구명조끼, 수영복, 비치타월..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짐이 한가득이다. 한 가득의 짐을 요리조리 잘 매고 기차역으로 왔다. 오랜만의 기차여행. 공항과 비행기를 설레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기차여행에서 설렘을 느끼는 사람이다. 물론 해외여행을 너무나 좋아하긴 하지만 공항과 비행기는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에게 기차여행은 그 기차 안에서의 과정마저 여행에 포함된다.
8월 15일 광복절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조금 느슨하였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기차표 예매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8시쯤 일어나서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이미 내가 타려고 했던 기차는 매진. 할 수 없이 6시 15분, 생각보다 이른 기차를 예매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기차역이 집에서 가까워서 부담 없이 출발할 수 있었다. 자리에 도착하니 내 자리에는 한 아이가 앉아있고, 그 옆에서 아이의 엄마가 앉아있다.
“저 혹시, 제 자리가 저 대각선인데 자리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애써 창가자리를 예매했지만 그래도 아이 때문이라 흔쾌히 자리를 바꿔준다. 자리에 앉아서 텀블러에 담은 커피, 책 한 권, 실 정리를 마무리해야 하는 코바늘모자를 꺼내니 이제 정말 기차여행 시작이다.
기차에 앉아 팟 캐스트를 들으며 실 정리를 쓱쓱 하다 보니, 제일 싫은 과정이었는데 어느새 완성이 된다. 그리고 책을 펼쳐 조금 읽다 보니 한 시간 반 만에 벌써 강릉에 도착.
도착해서 두리번거리니 같은 열차를 타고 온 친구가 멀리서 보인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이 는 옥수수가게. 옥수수를 한 봉(3개) 사서 바로 경포해변으로 향한다. 도착해서 파라솔을 설치하고 돗자리를 깔고 정리하니 9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바다로 뛰어들고 싶지만 9시가 돼야 해수욕장 개장을 하니 앉아서 옥수수를 먹으며 기다린다. 잠시 후 우렁찬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호루라기 소리를 듣자마자 바다로 뛰어들어간다. 바다는 뛰어들어가야 제맛이지. 순식간에 온몸을 다 담그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함이다. 이렇게 시원한 바닷물이라니. 저녁까지의 시간을 온통 바닷가 앞에서 보냈다. 수영을 하고 나와서 간식을 먹고, 다시 바다에 들어갔다 나와서 친구와 그동안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누고. 바다에 둥둥 떠서도 이야기를 하고. 다시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책을 읽고.
바닷가에 와서 사진만 찍는 사람들도 있었고, 발만 담가보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각자의 선호와 사정이 있고 나름대로 즐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바다에는 몸을 다 담거야지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뜨거운 햇빛아래 있는 이 차가운 바닷물에 온몸을 담가야만 열리는 가슴의 어느 부분. 언제부터 바다를 이렇게 사랑하게 됐을까. 예전에는 바다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번거로움’이었다. 공들여 한 화장도 지워지고, 잠깐 즐기고 나왔을 뿐인데 온몸은 머리까지 다 젖어서 또 머리를 감고 말려야 하는. 게다가 젖은 몸으로 숙소까지 가야 하는 찝찝함. 모든 것이 다 번거롭게 느껴져서 그냥 바라만 보거나 발만 담그고 말게 하는 번거로움. 이 모든 번거로움을 이기게 하는 것은 바다 안에서의 수영이다. 수영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원한 감각. 머리를 넣어 물고기들과 만났을 때의 신기함과 반가움. 바다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닌 목적지가 될 때 진정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간 경포해수욕장에는 ‘오리바위 다이빙’이 운영 중이었다. 구명조끼가 필수인데, 마침 빌려간 구명조끼가 있어서 입고 가보았다. 우리가 첫 손님. 안전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한 후 헤엄쳐서 오리바위로 간다. 우리가 꾸물거리는 사이 먼저 도착한 한 남성이 다이빙대 위에 서있다. 잠시 망설이더니 뛰어내리고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 밑에서 봤을 때는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위에 올라가니 한없이 높고 깊어 보여서 겁이 난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은 너무 콩닥거려 나를 응원해 주려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친구에게 까지 전해진다. 한참을 서 있었는데도 도무지 발은 떨어지지 않는다. 한참 성수기에는 줄을 서서 다이빙을 했다는 이곳. 그때는 1분 이상 하지 못하면 그냥 되돌아 내려가게끔 했다고 한다. 5분이 지났을까, 10분이 지났을까.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여태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준 라이프가드가 말한다.
“이제는 뛰실게요.”
아.. 그래 내가 너무 진상이지. 진짜 뛰어야 되는데.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금 더 용기가 나서 드디어 발을 뗀다.
발을 떼는 그 순간까지도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점프를 하니 1-2초의 그 짧은 순간에 온몸이 물속으로 들어간다. 구명조끼 덕분에 물에 바로 떴는데, 하고 나니 ‘해냈다!’는 기쁨이 나를 압도한다. 아직도 심장이 뛰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움에 약간의 기쁨과 설렘이 더해진 심장박동이다. 그 순간 며칠 전 본 영상이 생각났다. 그 영상에서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생각이 아니에요. 행동이에요.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해보고,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도 그건 도움이 되지 않아요. 대신에 진짜 도움이 되는 것은 아주 작을지라도 실제로 하는 행동이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물에 뛰어든 그 순간 정말 그 말의 의미가 더 와닿았다. 그리고 나는 바로 다시 다이빙대위로 올라갔다. 친구가 또 할 거냐며 놀라서 물었다.
“네, 아직도 무서운데 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려움은 있는데 극복하고 싶어요.”
그렇게 두 번째 올라갔을 때도 심장이 또 뛰는 건 마찬가지였다. 또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괜찮을 거라는 걸. 그래서 조금 뜸을 들이다가 또 눈을 질끈 감고 점프를 했다. 그렇게 3번을 더 점프하고 나서야 ‘이제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년에 또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마 내년에는 또다시 똑같이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들. 올해 여름 바다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