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에서 만난 완벽한 아침

1박 2일 동해여행기

by 김애정

오랜만에 기차에 몸을 싣었다. 강원도 묵호에 가는 길. 설 연휴에 아무런 일정도 없다가 이주일 전 갑작스럽게 겨울바다나 보러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동해에 아는 친구가 있어 연락을 해봤다. “혹시 설 연휴에 동해에 있어요? 그럼 저 까를라님이랑 동해에서 놀 수 있나요?” 그녀와는 지난 인천 퀴어페스티벌에서 함께 훌라 공연을 하며 연을 맺었다. 그렇다 해도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이 었기에 불편할 수도 있는 제안에 하트얼굴 이모티콘을 보내며 오라며 환대를 해주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설연휴 기차표를 찾아보았는데, 돌아올 때는 한 시간 정도 입석으로 와야 했지만 그래도 표가 있어 운이 좋게 동해에 가게 되었다.


동해시에 위치한 묵호. 이제는 동해보다 더 유명해진 곳이다. 작년에 묵호가 ‘여자 혼자 여행하기의 성지’라고 들었던 터였는데, 금세 유명해져서 SNS에도 묵호여행을 다녀온 후기가 심심치 않게 보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동수단은 기차이다. 기차여행만이 주는 설렘을 안고 e북에 책도 담고 텀블러에 커피도 담아서 길을 나섰다. 옷만 입고 오라는 친구의 말에 정말 옷가지만 챙겨간 이번 여행에는 정말 짐이 없이 가벼운 여행이었다. 그 자리를 친구에게 줄 선물로 채웠다. 동네에서 좋아하는 전통주집에 가서 시음을 해보고 새로 들어온 피스타치오막걸리를 하나 샀다. 디자이너 친구가 직접 만들어서 사놓은 제철달력도 남아서 하나 챙기고, 며칠 전 만든 두쫀쿠도 하나 담았다. 마지막으로 최근 꽂혀서 여러 개 만들어놓은 해파리 뜨개 키링과, 그 친구만을 위해 특별히 이틀 전 코스터도 떠서 담았다. 그렇게 기차에 오르고, 독서를 조금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이미 강원도였고 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다.


도착하니 역에 마중을 나온 친구와 포옹을 나눈 후, SNS에서 봐둔 유명카페에 가보았는데, 역시나 사람들도 꽉 차있어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운 대로 간 다른 차 전문점을 갔는데, 분위기가 훨씬 좋았다. 그곳에서 디저트와 차를 마시며 그동안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못 본 몇 달 사이에 서로의 삶에 꽤나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녁시간이라 저녁을 먹으러 갔다. 별빛청하를 하나 시켜 나눠먹으로 이야기를 이어갔고, 저녁을 다 먹고 나와 바닷가로 향했다. 파도소리가 엄청났다. 어두워서 바다는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도 그 파도소리가 가슴으로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사 온 전통주와, 화이트와인까지 따며 늦은 저녁까지 술잔을 부딪히는 소리와 이야기는 계속됐다.


여러 번 보기도 했고, 이야기도 나눌 시간이 있었지만 이렇게 둘이서 깊이 이야기를 해본 건 처음이었다. 떠나기 전, 이 친구의 나이도 모른 채로 그녀의 집에 왔는데 와서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나와 동갑이었다는 것이다. 내심 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친구사이에 나이는 상관이 없지만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지고, 잘 시간이 되어서 친구는 자리를 펴주고는 아침러닝을 한다는 나에게 일출시간을 알려줬다. 그 말을 들은 순간에는 약간 당황을 했다. ‘일출? 그렇게 빨리 일어날생각은 없었는데.’ 그런데 일출시간이 7시 20분이라는 말을 듣고는 ‘동해에서 일출러닝이라.. 나쁘지 않은데?’하는 생각이 들어 일출러닝을 결심하고 잠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6시 40분쯤 일어나서 세수하고 이만 닦고는 얼른 길을 나섰다. 바닷가 쪽으로 가서 일출을 보려면 조금은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한 3분쯤 뛰었을까, 꽤나 따듯해진 날씨에 뛰면 금방 더워지니 얇은 겉옷 하나만 입고 나왔는데 칼바람이 속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뛰었다가는 감기에 걸릴게 분명했다. 얼른 다시 들어가서 옷을 한 겹 더 입고 나오니 벌써 7시가 넘었다. 다시 바닷가 쪽으로 뛰다 보니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원래 가려면 목표지점은 아니었지만 그곳에 서서 가만히 해를 바라봤다. 앞에는 기찻길이 있고 그 너머에는 바다가 보이고, 바다 위로 해가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늦었다고 생각하고, 목표지점을 향해 앞을 보고 달려가지만 가장 좋은 순간은 그 길 자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오히려 이렇게 완벽한 곳에서 완벽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 그게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그렇게 떠오르는 해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원래 목표했던 지점으로 조금 더 달려갔다. 오히려 초라해 보였던 그곳. 그렇게 음력새해 당일 일출을 바라보고 돌아와서 씻고 다시 누웠다. 천국 같던 그곳. 30분쯤 다시 단잠을 자고는 일어나 친구가 어머니와 함께 만들었다는 귀한 채식만두로 만둣국을 먹으며 새해 아침을 시작했다. 그리고 훌라 동료이자 훌라강사이기도 한 친구에게 훌라를 배웠다. 관계와 유대에 관한 아름다운 곡 <Ka pilina>을 배웠는데, 다른 사람들이 추는 것을 눈으로 몇 번 봤지만 생각보다 정말 어려운 곡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침 먹고 춤까지 추고 우리를 다시 바다로 향했다. ‘상서로움을 바라다’라는 뜻을 지닌 탁 트인 망상해변. 해변 앞 카페에 갔는데 여기도 사람들로 붐벼 자리가 없었다. 언제 눈이 왔냐는 듯이 햇살이 꽤나 따듯하여 우리는 밖에 벤치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KakaoTalk_20260222_164458699_02.jpg
KakaoTalk_20260222_164458699_04.jpg

그렇게 1박 2일간의 환대를 마치고 친구를 보내줘야 할 때.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논골담길을 걸었다.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벽화들이 있는 걷기 좋은 곳이었다. 그렇게 쭉 역 근처까지 걸어서 미리 저장해 둔 책방에 들렀다. 요즘 종이 책을 웬만하면 안 사고 있었지만, 동네 책방에 왔으니 하나 사자 싶어 <아무튼 명상>을 사서 읽다 보니 어느덧 책방은 문 닫을 시간이 되고 밖은 조금씩 해가 지기 시작했다. 멀리 갈 시간은 안되어 묵호역 앞에 있는 조그만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인심이 넉넉한 사장님이 잘 먹는다며 부족해 보였는지 국물을 조금 더 가져다주시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서울에서 왔어요? 그래 보이네~”, “남자친구는 없어요? 결혼은 안 했나 보다. 그러니까 여행 왔겠지?”. “아~친구가 동해에 있다고. 어머 너무 좋겠다.”, “근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너무 잘나서 결혼을 안 하니까 문제야…”, “어머 몇 살이라고? 그렇게 안 보이는데 깜짝 놀랐네.” 마지막으로 사장님은 나에게 “동해남자는 만나지 마요~어디서 소문은 내지 말고~”라는 말을 해주셨다.


설연휴에 아무 잔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던 차에 만난 다름 귀여운 종류의 잔소리였다. 동해남자는 만나지 말라는 충고로 그렇게 동해여행을 마무리했다. 난 웃으며 대답했다.


“또 올게요.”


집에 와서 짐을 푸는데, 책방사장님이 넣어주신 엽서가 보였다. 받을 땐 보지 못했는데 꺼내보니 내가 일출을 본 바로 그 기찻길과 바다 사진이 담긴 엽서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피아노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