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기다림이었다. 9일이 되는 오늘까지 계속 기다리기만 했다. 의사를 기다리고, 검사를 기다리고, 결과를 기다리고... 그리고 치료를 기다렸다. 드디어 오늘! 항암치료의 방향이 정해졌고, 서둘러 시작했다.
화학항암제(세포독성항암제)를 3제(젬시타빈, 시스플라틴, 아브락산)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름대로 독성 항암제다. 또한 3가지를 한 번에 하기에 부작용도 크다. 그러나 반응률이 좋다고 했다. 우리는 네이버 카페에서 추천하는 방식과 병원에서 제시하는 방식이 같아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항암주사는 수액과 함께 3시간여 맞는다. 주사 맞기 전 긴장감이 돌았다. 간호사는 예정된 5시가 되자 스텐 바구니 한가득 주사액을 들고 커튼을 열었다. 호명하는 소리의 톤은 예전과 같았지만, 굉장히 차갑게 들렸다.
항암에 대한 공포는 어설프게 암을 건드리면 오히려 역공을 한다는 것이다. 은둔의 살인자처럼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항암제 공격이 시작되면 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걷잡을 수없이 커지거나 다른 곳으로 집을 옮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흔히 말기암 환자는 탈모된 상태에 바짝 마른 거죽을 감추고 피곤한 눈을 드러낸 채 휠체어에 실려 다닌다. 더 이상 약을 쓸 수 없는 상태로 봐서 역공을 당했거나 방치된 채 지낸 것이다. 치료에 실패한 것이다. 슬픈 곡조의 엔딩과 비극은 인간의 슬픔을 극대화하지만, 암의 관점에서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암 정복이 요원한 것은 암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임상을 해도 정복되지 않는 건 암이 인간의 영역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니 종교의 영역임이 뚜렷했고, 생과 사를 온전히 신에게 맡기게 된다. 환자와 보호자가 겪는 갈등은 이 지점이다.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가치 설정에 따른 혼란이 가중된다. 급여와 비급여로 선택을 요구한다. 실비 보험이 있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없다면 문제가 된다. 보험이 되는 영역을 훌쩍 뛰어넘는 치료도 있다. 대부분 신약이나 신기술 들이다. 생명과 돈을 저울질하게 된다.
사회적 시선도 한몫한다. 환자에 대한 시선이 때로는 불편하다. 그걸 의식해서인지 항암치료 전 아버지는 탈모부터 걱정했다. 머리카락이 있고 없음은 외형 변화의 중요한 지점이고 그건 타인의 시선에서 기인한다. 내부적으로도 끊임없이 도움받기를 원한다. 사소한 부분에서도 서운함을 느낀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극한으로 커진다. 고통이 정서적 영역뿐만 아니라 인지적 영역까지 심각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암환자가 그동안 알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이 끊임없이 변하며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공수래공수거'이니 사람에게서 돈과 관계를 뺀다면 남는 것은 목숨뿐이다. 생명의 가치는 흔히 절대적이라 생각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절대 사라지지 않는. 전생과 현생이 있다고 후생을 믿는 것은 귀납적 사고의 오류이지만, 많이들 윤회와 천국을 믿는다. 나는 이런 생각은 바보나 하는 것이라고 폄하하지만, 생의 끝에선 마약보다 훌륭한 진통제가 될지 모를 일이다. 간절한 소원은 고통 없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종교적 훈련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되도록이면 종교적 선택 없이 가고 싶다. 현 상태와 같은 지각 능력과 정보 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면 말이다.
마지막 밤을 한 환자의 기침 소리에 자주 깼고, 그때마다 복잡 미묘한 갈등 문제가 꿈속까지 따라와 괴롭혔다. 새벽까지 향후 일정을 고민했다. 네이버 카페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올라왔다. 암 진단을 받았다며 급하게 질문을 올린 글, 선수술인지 선항암인지 고민하는 글, 항암을 포기했다는 글, 호스피스 생활을 들려주는 글 들. 마치 우리가 컨베이어 벨트에 타 있는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차근차근 과정을 밟고 있는. 나에 의지선택이 얼마나 영향을 줄 지도 미지수일 것이다. 그래도 선택을 해야 하는 나는 코카서스의 프로메테우스처럼 예지능력을 잃고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숙명으로 받아들여함을 깨닫게 되었다.
내일 퇴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