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시작
2021년, 한 해는 많은 것을 남기고 지나갔습니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단지 사실에만 머무르지 않기에, 다 소화하지 못한 이야기는 가슴에 묻습니다. 훗날, 털어놓을 기회가 온다면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각색되어 전해지겠지요. 직장 이야기, 가족 이야기, 세상 사는 이야기가 시간에 따라 마치 음식이 발효되듯 따뜻하게 전해질 날을 기다립니다.
오늘은 2022년의 기록을 남기고자 털털하게 날짜를 제목 대신하여 글을 시작합니다. 2022년의 1월 4일은 좀 특별한 날입니다. 1년을 쉬어가고자 휴직계를 제출했습니다. 왜 쉬고자 했는지는 오늘 다 못할 이야기입니다. 또 쉰다고 쉬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돈 버는 일을 잠시 멈추기로 한 것입니다. 영원히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습니다. 가족 간의 충분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식탁에 앉아 아이들에게 선언을 하듯 “아빠, 내년에 휴직한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가난하게 살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끝을 맺었습니다. 15, 11, 5살 아이들이 제각각 물었습니다. “왜 우리가 가난해져요?”, “아빠 무슨 일 있어요?”, “그럼 나랑 많이 놀아주는 거야?”
가난과 소박함, 불편과 자유, 부족함과 여유가 상반된 것처럼 보여도 같은 것의 다른 명칭임을 알려주기 어렵습니다. 가난을 소박함이라 한다면 누군가는 정신승리라며 비웃기도 할 것입니다. 부족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담을 여유가 넘친다고 하면 언어도단이라 몰아붙이지 않을까요? 무언가 기준을 그어 설명하기 애매합니다. 얼버무리며 식사를 마치고 대화를 끝냈습니다. 사실, 저 또한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 자유가 아닌 이상 자발적 가난은 혼자 하기에도 엄청난 실험입니다. 5인 가족의 가장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죠. 가족의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멈춘다고 했습니다. 이후 자급자족의 삶을 꾸려갈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지는 앞으로 1년이 답해주겠지요.
오늘은 특별함의 시작입니다. 올해 한 해가 더 특별해지도록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딛습니다. 메모장을 꺼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끄적였습니다. 누군가가 전해 준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이 무엇일까?’ 잘 죽기 위해 필요한 것을 채웠습니다. 인생의 반을 영역을 넓히며 무언가 채웠으니 나머지 반은 채워진 것을 정리할 차례입니다. ‘밥상의 재료는 어디서 왔을까?’ 건강의 의미를 좀 더 폭넓게 해석해 보고 싶었습니다. 좋은 음식 이전의 재료부터 관심을 두고, 농사를 지어 밥상을 차려보고 싶습니다. ‘사람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결국 모든 것이 연결되고 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 일과 쉼, 어제와 내일이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입니다. 심지어 섭취와 배설도 같습니다. 음식을 먹고 배설을 하면, 퇴비로 만들어 건강한 식재료를 키웁니다. 생과 사가 순환하고 노동과 휴식이 공존합니다.
그동안 너무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직장 업무든, 가사든... 모든 것이 고된 동이 되어버린 시점에서 일과 쉼을 구분 짓고 지속 가능한가에 초점을 맞춰 리빌딩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시골생활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과 접하면서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생계를 위한 노동 네 시간, 지적 활동 네 시간, 좋은 사람들과 친교하며 보내는 네 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 / 스콧 니어링 자서전, 375p
언젠가 원했던 '완벽한 하루'를 보낼 때가 찾아왔습니다. 가족과 타협하다 보니 '시골생활'이 아닌 것은 아쉽습니다. 그래도 작게나마 도시 속의 '소로 Thoreau'를 그려볼 수 있는 희망이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