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사기꾼을 만나다
대학 3학년 시절, 학교에 공고가 붙었다. 토익 시험 점수에 따라 한 달간의 어학연수를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성적에 맞춰 갈 수 있는 나라가 나뉘었고, 1순위는 미국 하와이, 2순위는 호주 시드니, 3순위는 싱가포르였다. 당시 그건 내게 공짜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 달 가량 되는 기간 동안 학교에서 해주는 토익 수업을 아주 열과 성을 다해 들었고 시험을 봤다.
정신 차려보니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나를 포함해 총 11명이 갔는데 전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타지에서 한국인들의 끈끈함이란 그 점도가 정말 남다르다. 인천에서 호놀룰루로 가는 고작 그 9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친해졌다. 그렇게 어학연수 생활은 시작되었다.
영어 공부보다는 수업이 끝난 후 바다에 둥둥 떠있는 게 몇 백 배는 더 재미있던 어느 날, 어학원 앞에 어떤 남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몹시 구릿빛의 피부를 가진, 할아버지에 가까운 아저씨였다. 그는 나와 내 옆에 같이 있던 한국인 여자 동생에게 다가와 서핑을 하자고 했다. 대충 알았다고 둘러대곤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곤 다운타운에 가 한참을 구경하다 와이키키 비치로 갔는데, 그가 거기 또 있었다. 서핑하러 오기로 해놓곤 왜 안 왔느냐고 대뜸 역정을 냈다. 이때라도 알았어야 했는데. 난 내일 꼭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이름과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까지, 그가 건넨 흰 종이에 까만 네임펜으로 내 소중한 개인정보를 꾹꾹 눌러 적어주고 왔다.
그리고는 메일이 한 통 왔다. 내일 몇 시에 어디로 오라고 했고, 돈을 얼마 가져오라고 했다. 꼭 현금이어야만 한다고. 눈에 뭐가 씌었던가. 나는 그 길로 ATM기에 가 그가 요구한 돈을 인출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피해자는 순순히 돈을 가지고 사기꾼에게 가 친히 손에 쥐어줬다. 그 순간 그는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겠는가.
참, 그러고 보니 알아차릴 두 번째 기회가 또 있었다. 그를 만나 수영복을 사러 갔는데, 그 매장의 직원이 내게 그를 조심하라며 연락처를 줬다. 하지만 나는 뭐 설마 큰일이야 나겠냐며 안일하게 생각하곤 그를 따라 매장을 나섰다. 그 때라도 뒤돌아 집으로 갔어야 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와이키키 비치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업이라 하기엔 살짝 애매한 서핑 클래스가 시작됐다. 아니 그런데 웬걸, 재미있었다. 물론 나는 운동신경 제로에 경미한 물 공포증이 있어 생각처럼 실력이 빠르게 늘진 않았지만, 그저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자체가 짜릿했고 즐거웠다.
첫 수업 후 온몸에 멍이 들고 이틀 뒤. 서핑 수업을 들으려 와이키키 비치로 갔는데, 그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 멀리 그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조금 멀찍이서 어떤 사람이 우릴 불렀다. '진짜' 서핑을 알려주는 전문 강사, 데이빗이라고 했다. 그가 뒤이어 뱉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저 사람은 서핑을 가르쳐줄 자격도 면허도 없고, 그저 사기꾼일 뿐이라고. 너무 놀라면 순간적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몸소 체험했다. 누군가에게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당황스러웠고, 더듬더듬 뱉은 첫마디는 “ㄱ, 그럼.. 우리가 낸 돈은?” 정도였다. 이미 줘버린 돈은 돌려받을 수 없을 거라고, 그냥 앞으로 엮이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돈도 돈이었지만 심적으로 괴로웠다. 이 먼 타지까지 와서 사기를 당하다니. 이제야 든 생각이지만 그때 그 수영복 매장의 점원에게 전화를 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당시 그 상황에 대한 대처랄 건 전혀 없었다. 그저 나의 믿을 수 없는 우매함에 기막혀한 것이 전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어떤 액션을 취했다가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조금 무섭기도 했고.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겠거니 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교훈은 명백했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개인정보를 주지 말 것, 서핑 강습을 받지 말 것, 현금을 주지 말 것. 무엇보다도 모르는 사람을, 또는 모르는 것을 함부로 믿지 말 것. 어떤 상황이든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