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라라랜드는 어떤 곳인가요

LA에서 만난 마음씨 좋은 사람들

by 지민

2016년 연말 <라라랜드>가 개봉했다. 첫 관람 후 사랑에 빠져 N차 관람을 찍었고, 기어이 이듬해 LA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평소 여행지에서 관광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영화의 주요 배경지인 그리피스 천문대는 꼭 가야겠다 싶어 여행 전부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일찍이 짐도 다 싸놓고, 출발만 기다리던 차 사고는 갑자기 찾아왔다. 떠나기 3일 전 발목에 금이 가 깁스를 하게 된 것. 별 수 있나. 그 다리를 끌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렇게 꾸역꾸역 LA로 가 미리 도착해 있던 친구를 만났고, 이튿날 렌트한 차를 타고 샌디에고로 향했다. LA에서 샌디에고까지는 3시간 정도 걸렸다. 도착하자마자 라호야 비치로 가서 근처에 주차를 해놓고 바다로 갔다. 물개, 바다사자, 바다표범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생애 처음이었다. 미디어를 통해서만 봤던 그들은 생각보다 무서웠고, 신기했고, 냄새가 지독했다. 반갑고도 낯선 육식동물과의 인사를 끝내고 다시 주차해놓은 곳으로 갔다.


차 앞 유리에 비치로 가기 전엔 분명 없던 것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가서 보니, 불법 주차 딱지였다. 발부된 시간을 보니 바로 10분 전에 붙은 것이었다. 피 같은 57달러… 도리가 있나. 쓰리고 고픈 속을 달래려 일단 차를 타고 식당이 있는 곳으로 가 주차를 하는데, 쾅. 실수로 뒤에 주차된 차를 치고 말았다.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바로 앞 인도 음식점 주인 아저씨가 나왔다. 그의 차였다. 그는 너그러운 미소로 괜찮다고 말하며 되려 놀란 우리를 달래주었다. 죄송한 마음에 우린 그 식당에 들어가 배를 채웠다.


주차 딱지와 함께 무사히 LA로 돌아온 우리는 뻗어버렸다. 해가 뜨고 시타델로 향했다. 오늘은 쇼핑데이. 하루 종일 다친 오른발과 멀쩡한 왼발이 터지도록 걸어 다니며 돈을 썼다. 해가 지고 양손이 모자랄즈음 운동화 4켤레를 들고 계산하러 가는데, 친구는 멀찍이 떨어져 있고 나 혼자 도저히 짐을 다 들 수 없어 한편에 놓아두고 계산대로 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거 너 짐이야?” “응, 나 손이 없어서..” “이렇게 두면 누가 훔쳐가! 내가 너 계산할 때까지 들고 있을게.” 생면부지의 세상 스윗한 그 언니는 내가 계산이 끝날 때까지 내 짐을 들고 기다려주었다. 아니, 미국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땡큐를 연신 외치며 무사히 계산을 마쳤다.


다시 또 다음날. 다운타운의 그랜드 센트럴 마켓으로 가기 위해 리프트를 탔다. 미국에서는 리프트를 택시처럼 사용하는데 합승하는 경우도 꽤 흔하다. 우리가 타고 가는 리프트에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합승을 했다. 바로 옆에 탄 여자가 내 다리를 보더니 괜찮냐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고, 이를 시작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4월에 이 곳으로 이사를 왔고, 음악을 만든다고 했다. 몹시 LA스러운 직업을 가진, 부러운 커플이었다. 이후로도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별스러운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미국인들에겐 필수와도 같은 그저 지나가는 스몰 토크일 뿐이었지만, 처음 보는 내 다리를 걱정해준 것이 괜스레 따뜻하게 느껴졌다.


작곡가 커플과 안녕하고 우린 마켓의 에그슬럿에서 허기를 달랜 뒤 영화를 보러 갔다. 할리우드 거리에서 영화를 보다니 꿈만 같았다. 사실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고 싶었는데 상영시간이 너무 늦어서 바로 볼 수 있었던 <플랫라이너>를 봤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고른 고른 영화였는데 생각보다 재밌었고, 너무너무 무서웠다. 생각지도 못했던 공포 영화에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꺅꺅 소리를 지르며 롤러코스터를 탔는데, 속으로 다른 관객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하며 괜히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비명을 어떻게 막으랴.


영화가 끝나자 옆 옆 자리에 앉아있던 관객 둘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역시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굴었나, 영화 매너가 너무 형편없긴 했지, 한국인이 아닌 척해야 하나.' 그 짧은 찰나에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인사 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너네 덕분에 정말 재미있게 영화를 봤어! 고마워!” 한국에서 생전 받아본 적 없는 대접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지만 너희가 즐거웠다니 나도 즐겁구나. 그렇게 웃으며 인사하곤 기분 좋게 극장을 나왔다.


7일간의 짧은 여정에서 스치듯 만난 인연들은 연중 2~30도를 웃도는 로스앤젤레스의 날씨만큼이나 따뜻했다. 천사들의 도시(The City of Angels)라는 별칭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었던 소중한 일주일이었다. 물론 내가 만난 사람들이 LA의 모든 사람들을 대표할 수 없고, 개중에는 분명 좋기만 한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게 로스앤젤레스는 노란빛의 따뜻한 사람들로 기억되는 도시다. 그리고 앞으로도 늘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