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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Jul 22. 2023

스마트폰 크기만큼 좁아진 세계

과거 나를 포함한 중고등학생들은 길거리에서 눈빛으로 기싸움을 하곤 했다. 이른바 '야리기'다. 길 맞은편에서 또래가 걸어오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먼저 시선을 돌리면 패배자가 됐다. 이 길거리 눈싸움은 종종 실제 주먹다짐으로 번졌다. 내 친구는 악의 없이 상대방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상급생 형들에게 오해를 사 한 대 얻어맞은 적도 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센 척하며 거들먹거리고픈 사춘기 청소년 특유의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길거리에서 마땅히 시선 둘 곳이 없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다가오면 눈길이 가고, 서로의 시선은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끌리기 마련이다. 이때 아이들은 자존심 싸움을 하는 반면 성숙한 어른들은 땅으로 눈을 내리 깔아 시선을 피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색한 순간을 피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는 척하면 된다. 사실 앞뒤가 바뀐 건지도 모르겠다. 인류가 스마트폰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모르는 이와 시선을 마주할 일이 이제는 거의 없으려나? 걷거나 버스·지하철에 타면서, 심지어 식사하면서조차 스마트폰 화면을 보니까.


그러자 우리는 - 적어도 나는 - 주변의 변화에 무감각해졌다. 얼마 전 동네에서 외식한 후 집으로 걸어가던 길, 아파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와이프가 "아이스크림 좀 사가자"며 단지 내 상가로 이끌었다. 그런데 웬 처음 보는 무인 편의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며 걸어가는 길이었다.


"어? 여기 있던 크린토피아 어디 갔지?"

"크린토피아 없어진 지가 언젠데 무슨 소리야"


집 앞 가게가 폐업하고, 공사하고, 새로운 가게가 들어선 것도 모를 정도로 스마트폰 습관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상 폰만 쳐다보는 것도 문제지만 스마트폰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기회도 빼앗아간다.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때 혹자는 TV를 '바보상자'라고 비판했다. TV가 제공하는 즐거움과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이라고 뭐가 다른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유튜브를 켜놓고 엄지손가락을 아래위로 휘적이다 보면 10분~20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특히나 요즘엔 수초짜리 짧은 동영상 '숏폼'이 대세다. 지인들 근황을 보려 했다가 어느 순간 개나 고양이가 재롱피고 평소에 알지도 못했던 아이돌 댄스를 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본 건 많은데 정작 기억나는 건 없다.


스마트폰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에 뇌는 잠식돼 지치고 만다. 짧은 에세이 쓰는 것 초자 어색하다. 정보는 포털이나 챗GPT를 통해 수집한 뒤 복사+붙여넣기로 짜깁기하면 되지만, 나만의 생각이나 표현을 쓰기 위해선 그만한 사유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런데 진득하게 상념이나 공상에 빠져본 적이 언제던가? 상상력과 창의력의 방은 닫힌 지 오래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우리는 고개를 들고 늘 주변을 관찰하며 다녔다. 등굣길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골목에서 나타나는 사람을 보며 그가 누구인지, 문구점에 어떤 물건이 새로 들어왔는지, 분식집에서 새로 팔기 시작한 매운맛 닭꼬치 맛을 궁금해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는 창 밖 풍경을 감상했다. 귀에는 좋아하는 노래로 꾹꾹 눌러 담은 MP3 이어폰을 꽂고 가사를 곱씹으며.


이제는 인공지능(AI)이 자동 선곡해 매번 새로운 노래를 무한 재생시켜 주는 시대다. 어떤 아티스트의 어떤 제목의 노래인지도 모른 채 들으니 감흥도 없연상되는 추억도 없다. 스마트폰으로 인식의 지평은 넓어졌을지 모르겠으나 사고의 범위는 손바닥 정도에 꽉 갇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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