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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Aug 14. 2023

오펜하이머 보기 전, E=mc²를 공부하자

E=mc²(이 이퀄 엠 씨 스퀘어)


한국사람, 그중에서도 연배가 좀 있다면 ‘엠씨스퀘어’라는 학습 보조기구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해당 공식과 기계는 별 상관이 없다.


공식을 요약하자면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전환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른쪽 변에 빛의 속도(c)의 제곱이 곱해진다. 빛의 속도는 약 300,000,000m/s. 1초에 3억 미터를 이동할 수 있는 빠르기다. 음속으로 따지면 90만 마하(Mach)에 해당한다. 따라서 질량 변화가 작더라도 c²이 곱해지면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감이 안 오는가? 사실 E=mc²는 늘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태양 E=mc² 그 자체다. 태양은 그 자체가 거대한 수소폭탄이다. 수소원자 4개가 핵융합을 통해 헬륨이 되는 과정에서 빛과 열을 발산한다. 질량 1짜리 수소 원자 4개가 더해지면 총질량은 4가 될 것 같지만 실제론 3.993로 측정된다. 감소한 질량은 에너지로 발산된다. 매초 400만 톤의 수소가 핵융합하면서 내는 빛과 열 덕분에 식물은 광합성으로 유기물을 생산하고, 동물은 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영양분을 얻는다.


이 공식을 알아낸 과학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1905년의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대여섯 주 만에 38장의 논문 초안을 완성하고 곧바로 3장의 보충 논문을 썼다. E=mc²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공식이 인류에 무시무시한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간이 이 공식을 이용해 가장 먼저 개발한 물건은 원자폭탄이다. 질량 235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면 질량 92 크립톤과 질량 141 바륨으로 쪼개지고, 중성자 2~3개와 에너지 200MeV가 나온다. 방출되는 중성자들은 중수(heavy water)를 통과하면서 다른 우라늄과 폭발적인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데이비드 보더니스 「E=mc²」 (생각의나무) 171p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독일은 경쟁적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했다. 하지만 시작은 독일이 몇 년이나 앞섰다.


나치의 괴변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원자 분열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연구는 이제 최소한의 노력으로 엄청난 파괴력을 생성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독일인이 다른 민족들보다 우위를 차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다."


나치 과학자의 중심엔 불확정성원리와 양자역학 연구로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있었다. 아인슈타인 이후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로 일컬어지지만, 1939년 독일 나치 핵무기 국에 자원해 원자폭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원자폭탄 개발을 먼저 시작하지 않았을까? 지도층에게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가 원자폭탄 연구를 시작하던 해인 1939년,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라늄 원소가 향후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것인데, 이는 가공할 만한 위력의 폭탄 제조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 위대한 과학자의 충고를 두 번이나 거절했다. 미국은 이후 영국이 독일의 원자폭탄 연구 사실을 알려주고 나서야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데이비드 보더니스 「E=mc²」 (생각의나무) 195p


우여곡절 끝에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2년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감독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오펜하이머는 완벽주의자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하버드를 3년 만에 졸업하고 원자 모델 중 하나를 제시한 러더퍼드의 실험실에서 공부한 수재였다. 하지만 남의 고충을 이용할 줄 아는 차가운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후발주자인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은 독일의 원자폭탄 연구를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시 원자폭탄 개발의 핵심 중 하나는 중수(D₂O) 확보였다. 일반적인 수소의 질량은 1이다. 그런데 자연에는 질량 2짜리 수소도 존재한다. 이런 수소로 이뤄진 물이 중수다. 일반적인 물을 매개로 해선 우라늄 핵에 중성자를 쏘아 폭발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 상태의 우라늄 광산은 이미 오래전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물보다 무거운 중수를 매개로 중성자의 속도를 낮추면 우라늄 핵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이젠베르크는 중수를 확보하기 위해 노르웨이 베모르크에 있는 휘드로 화학공단을 접수했다. 한 달 10kg에 불과하던 중수 생산량은 4500kg까지 증가됐다. 영국은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이 공장을 폭파시키기로 했다. 30명의 공수부대가 야간 작전에 투입됐다. 그런데 강한 눈보라 때문에 글라이더가 추락하고 말았다. 일부는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부대원들도 독일 군에 잡혀 총살되거나 고문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대량 희생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두 번째 공습을 결정했다. 그만큼 원자폭탄 개발을 저지해야 할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다. 2차 작전엔 공수부대원 대신 9명의 노르웨이인 자원자들이 크로스컨트리용 스키로 공장에 침투했다. 대원들은 공장의 정문으로 침투하는 대신 공장 직원들을 포섭했다. 한 기술자가 공장에서 잘 이용하지 않는 케이블 수송관을 일러줬다. 대원들은 수송관을 통해 공장으로 침투했고,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10여분 동안 폭발물을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새벽 1시쯤, 공장 창문 안으로 짧은 섬광이 비치고 곧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중수가 공장 배출구에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독일은 공장을 재정비해 대량의 중수를 생산해 냈다. 영국은 다른 작전을 펼쳐야 했다. 이번엔 중수를 실은 여객선을 호수 위에서 폭파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그 배에는 독일군뿐만 아니라 일반인 등 53명이 타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도덕적 흥정에 시달렸다. 결국 민간인의 목숨보다 원자폭탄으로 인한 대규모 살상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가 앞섰다. 여객선 폭파로 십수 명이 배와 함께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다.


결국 이 작전을 통해 독일은 원폭 개발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정부 지원금도 축소되기 시작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작은 마을에 틀어박혀 연구를 계속했지만 결국 미국의 기습 작전 중 체포되고 만다.


이후 미국은 경쟁자 없이 원자폭탄을 완성했고, 사이판섬에 있는 전투기에 우라늄235를 탑재시켰다. 하지만 원자폭탄 투하 여부를 놓고 찬반 격론이 오갔다. 미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원자폭탄 투하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이젠하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항복할 준비가 돼있는데 굳이 대량살상을 할 명분이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대통령 임시 위원회는 원폭 투하를 결정했고, 오펜하이머는 이를 수락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전 세계는 E=mc² 반응의 위력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목도했다.


*이 글은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E=mc²」 (생각의나무)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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