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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Jul 26. 2023

민원 응징 사회

몇 달 전 금융감독원에 온 민원인 A씨에게 명함을 건넨 적이 있다. A씨는 모 은행이 당신 어머님의 예금을 몰래 빼갔다며 민원을 상담하러 왔는데, 여건상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했다. 나는 '그럴 리가 없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조사 결과가 나오면 연락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어제 다른 기사를 마감하러 회사로 가던 길, 광화문 사거리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A씨였다. 의외의 장소임에도 얼굴을 알아보다니 꽤나 신기했다. 명함을 받은 뒤 인터넷에서 이름을 검색해 보며 제보 여부를 꽤나 고민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얼굴이 눈에 익었으리라.


A씨는 얘기를 마저 쏟아냈다. 민원의 개요는 이렇다. 모친이 세입자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받았는데 그중 수천만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A씨는 은행이 돈을 빼돌렸을 거라 의심하고 금감원에 민원을 넣었다.


마감이 임박해 마음에 여유가 없긴 했으나, 말을 끊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본능적인 호기심도 들어서 의아한 점 몇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A씨는 모친이 돈을 실제로 받았는지, 은행 계좌이체나 현찰 중 어떤 방식으로 받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더 캐물어보니 보증금을 모친이 아닌 A씨의 친동생이 받았다고 한다. 나는 A씨에게 은행 민원보다 동생에게 받은 돈의 행방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다. 


민원인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알겠노라 하더니 이번엔 다른 얘기를 꺼냈다. 서울주택공사(SH)가 집에 아무나 입주시킨다며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웃에 80대 노인이 사는데 치매에 걸린 것 같고 소란을 자주 피워서 아주 성가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SH는 왜 아무 사람이나 받아주느냐"며 짜증을 냈다. 


이번엔 80대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민원을 낸 모양이다. 이날도 국민권익위원회 민원센터에 다녀오던 길인 걸로 보인다. 112 신고도 솔찬히 한 것 같다. SH 주택은 애초에 서민 주거안정을 위해 지어진 집이다. 그런데 80대 노인이 치매에 걸렸단 이유로 쫓아내라니... 과연 민원을 제기하는게 타당한 일일까?


"당신, 내가 끝장내 주겠어!"


사람들은 불합리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때 민원을 넣는다. 민원제기는 시민이 지닌 정당한 권리다. 걔중엔 위험을 무릅쓰고 조직의 불합리를 폭로하는 내부고발자도 있다. 반면 맘에 들지 않는 상대방을 난도질하기 위한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이도 적지 않다. 


제보도 어떤 면에선 민원의 다른 형태다. 나도 몇 전 이용당한 적이 있다. 공익성이 있어서 열심히 취재했더니, 제보자가 돌연 기사를 내지 말아 달라며 태도가 돌변했다. 취재 과정에서 이미 상대방이 심리적 압박을 받고 백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제보자는 이미원하던 바를 다 이뤘고, 굳이 기사를 내보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던 것이다.


언급하긴 조심스럽지만, 돌아가신 서이초 교사를 포함한 학교 선생님들도 평소 악성 민원에 시달린다고 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7월 25∼26일 전국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교원 및 전문직 3만2951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트레스 원인으로 '생활지도(문제행동)'가 46.5%로 1위였고 '민원'이 32.3%로 뒤를 이었다.


 민원을 제기하기 전에 과연 내가 가진 불만이 정당한 것인지, 민원의 상대방이 어떤 고통을 받을지, 내가 역으로 민원의 대상이 된다면 어떨지 잠깐만이라도 고민할 수는 없을까. 흉기로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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