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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Apr 04. 2022

평일에 쉬는 날

일상다반사

야간 당직을 마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다. 아내의 인기척 대신 햇살이 집 안을 살랑살랑 채우고 있었다. 청명한 봄날의 아침.


거실로 들어서자 그간 집들이 선물로 받은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분들은 구석마다 멋없이 몰려있었다. 집주인의 무관심 속에서도 대부분 구김 없이 살아가고 있었지만, 몬스테라라는 친구는 달랐다.

 

거실 한쪽에만 오래 놔둔 탓인지 녀석의 잎과 줄기는 햇빛이 들어오는 베란다 방향으로 쏠려있었다.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 두상이 예뻐지려면 적당히 돌려눕혀야 한다고 들었는데. 한쪽으로만 뉘어 키운 꼴이었다. 마치 내 두상처럼.


햇빛을 잘 받을 수 있게 화분들을 거실 안쪽으로 옮겼다. 푸릇푸릇한 식물을 보고 있자니 밤샘 당직으로 피곤한 가운데 싱그러운 기분이 샘솟는다. 부모님 집에서 살 때엔 뭐하러 저렇게 화분을 키우나 싶었는데.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머리를 뽀송하게 말리고,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워 휴대전화를 쳐다본다. 이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의 치열함이 알람 소리로 현화하여 신경질적으로 울려댄다. 살포시 알람을 꺼버렸다.


별 시답잖은 꿈을 꾸다 4시간 뒤 눈을 떴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지만 여전히 화창한 봄날이었다. 신선한 공기가 고파 창문을 열었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밀려 들려온다.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었다. 내열 유리잔에 스틱커피 두 개를 털어 넣고, 커피가루를 겨우 녹일 수 있을 만큼의 뜨거운 물을 살짝 붓는다. 진한 커피 향이 올라온다.


이대로 마시면 에스프레소인 건지 궁금해졌지만, 시도하진 않기로 한다. 미지근한 생수를 3분의 2쯤 붓고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넣는다. 커피가 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지만 그득히.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다 남은 패스츄리가 있다. 하얗고 작은 도자기 접시 위에 빵을 담아 서재 책상으로 간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고 첼로 연주곡을 재생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만해지는 여유로움. 책상에 올려둔 작은 치자나무를 보니 산뜻함이 더해진다. 내가 원래 식물을 좋아했던가.


원래는 사건 취재기를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밝은 봄기운으로 충만해진 집 안에, 치열했던 과거의 어두운 기운을 발산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메모장을 켜고 지금의 기분을 써보기로 한다. 마땅한 제목도 떠오르지도 않고, 글의 주제도 생각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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