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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Oct 31. 2022

나의 소소한 커피 자서전

자판기부터 전자동 머신까지 커피와 함께한 일상

믹스커피가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


"커피는 어른들이 마시는 거야"라는 말을 언제부터 듣지 않게 됐던가. 어쨌든 내가 커피를 입에 달고 산 건 수능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아침밥은 걸러도 커피는 등굣길 버스정류장 편의점에서 꼭꼭 사 마셨다. 방과 후 독서실에 가면 우선 진한 믹스커피부터 들이켜고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잤다. 그동안 카페인은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면서 세포 하나하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20분만 자고 일어나도 그렇게 개운하고 집중이 잘 될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방법은 '커피냅(커피 + 낮잠)'이라고 해서 실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머리론 몰라도 몸은 커피 좋은 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 머리에 부하가 오면 밖으로 나가 따끈한 믹스커피에 선선한 밤공기를 섞어마시며 기분을 전환했다.

커피를 즐기기 위한 공간이 있다고?


'카페'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된 건 2007년 봄쯤 대학교 신입생 때였다. 신촌에서 점심을 먹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 그전에 잠깐 커피 마시자는 친구.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커피란 자판기 믹스 아니면 가게에서 파는 레쓰비나 '악마의 유혹' 프렌치카페가 전부였다.


처음 카페 앞에 섰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간판엔 하얀 날개 달린 아기천사가 맑게 웃고 있었다. '우리 안의 천사(Angel-in-us)', 상호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카운터에 걸린 메뉴판을 보고 그만 얼어버렸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는 무엇이며 카페라테, 카푸치노는 다 무슨 차이인지…. 얼른 주문하라며 재촉하는 친구. 그런데 곧 눈치를 챘는지 "혹시 카페 처음 와봐?"하고 묻는다. 하지만 짐짓 익숙한 척 입을 열다.


"에스프레소 주세요ㅎ"


친구가 "진심이야?"라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메뉴판을 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격이 제일 저렴한 걸 골랐다. 당시 에스프레소는 2000원이었고 다른 커피들은 3000원대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해가 안 됐다. 편의점 프렌치카페 두세 개 값이. 천사 폭리를 취하다니, 이 경우만큼은 악마가 옳았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나는 어이 상실했다. 살다 살다 처음 보는, 웬 아기들 소꿉놀이 장난감 같은 잔에 한 모금도 안 되는 커피가 담겨 나온 게 아닌가. 반면 친구가 시킨 커피는 양이 딱 봐도 내 커피의 열 배는 돼보였다. 친구는  보더니 "그럼 그렇지"하며 낄낄댔다. 체면을 제대로 구겼다.

엔제리너스 커피/출처 엔제리너스 페이스북

첫 만남은 순탄치 않았지만 이후 나는 인생의 상당한 시간을 카페에서 보냈.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공부도 하고 조모임도 했다. 마땅한 과외 장소가 없을 땐 카페에서 학생들을 가르다. 코가 비틀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느라 막차를 놓친 날엔 24시간 카페 소파에 드러누워 첫차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자판기 커피나 악마의 유혹 대신 아메리카노에 익숙해졌다. 무더운 여름이면 '아아'를 마셨고, 날이 선선해지면 '뜨아'로 몸을 데웠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의 등장…단돈 몇 백 원에 즐기는 인스턴트 아메리카노


2011년에 '카누'라는 제품이 등장했다. 아메리카노를 표방하는 인스턴트 원두커피였다. 가루커피 특유의 탁함과 탄 맛은 있지만, 카페에 가지 않더라도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다는 혁명과도 같았다. 당시는 주머니 사정이 궁하던 고시생이었어서 특히나 그랬다. 100개들이 카누를 지퍼백에 옮겨 담아 가방에 든든히 넣고 다녔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텀블러에 까만 커피 가루와 정수기 물을 붓고, 은은하게 퍼지는 크레마를 감상하며 아침을 열었다.


취직해서도 나는 찬장에 인스턴트커피를 쟁여놓고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한두 잔씩 타 마셨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였다.

까다로워진 입맛, 이젠 집에서 드립 커피를 즐기다


이후 나는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담한 신혼집을 꾸렸다. 싱글일 땐 집에 있으면 좀이 쑤셨는데, 사회생활에 찌든 탓인지 어느덧 나도 '집 밖은 위험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 부부는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해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빈도가 늘었다. 카누도 나쁘지 않았지만 기왕이면 좀 더 맛있는 걸 찾아보자며 유명 프랜차이즈의 인스턴트 원두커피를 이것저것 사보았다.   


그러던 중 드립백 커피와 핸드드립 그라인더를 집들이 선물로 받았다. 드립 커피는 익숙지 않아 처음엔 커피를 내리는 것도 어렵고 맛도 어색했는데, 금세 드립 커피의 맑으면서도 진한 맛에 길들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드립백은 바닥났고, 매번 그라인더를 쓰기도 귀찮았다. 특히나 무더운 여름엔 커피 한 잔 마시겠다고 땀을 한 바가지 쏟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전자동 커피머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주기적으로 청소하고 관리하는 게 매우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런데 자려고 눈을 감으면 떠오를 정도로 내 무의식은 이미 커피머신을 원하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끝에 결국 D사의 커피머신을 구입했다. 이젠 아침에 일어나 커피콩을 분쇄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고, 투명한 유리잔에 커피를 내며 일과를 시작한다. 머리가 복잡할 땐 커피콩의 달콤 고소한 향기를 맡으며 심신을 다독인다. 다음엔 어떤 콩을 살지 고민하는 것도 즐겁다.


스타벅스에서 홀빈을 사고 집으로 가는길, 커피와 함께 했던 옛 순간들이 마음을 스쳤다. 믹스커피를 타마시던 고등학생은 어느덧 고급스럽게 원두커피를 내리는 중년이 되었다. 향도 맛도 분위기도 모두 지금 커피가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커피를 만끽하고 낮잠을 즐겨본 때가 언제였던가. 커피를 마시는 순간의 내 모습은 예전보다 각박해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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