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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Jun 28. 2022

[스페인]빛과 곡선의 가우디

여행 2일 차 Part 1

#2일 차 전반


바르셀로나 여행의 절반, 안토니 가우디 건축물 투어


카사 바트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오면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가우디 투어를 한다.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는 '건축의 신' '건축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스페인 건축가다. 대학교 때 건축을 공부한 아내는 미리 읽어놔야겠다며 『스페인은 가우디다』(김희곤 저) 책도 구입했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는 아내에게 책을 빌려 틈틈이 가우디를 공부했다.


우리는 마***트립 플랫폼을 통해 팔***투어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아침 8시쯤 첫 번째 행선지인 카사 바트요 앞에서 가이드를 기다리며 건물 외관을 구경했다. 근처 벤치엔 같은 프로그램 일행으로 보이는 한 중년 남성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별안간 황망한 표정을 하더니 바로 앞에 있는 지하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남성들이 도착한 가이드와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니 벤치에 올려뒀던 소지품을 소매치기당했다는 것 같다. 소매치기 3 대장 도시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크로스백 잠금장치를 다시 확인했다.

카사 바트요

카사 바트요(Casa Batllo)의 'casa'는 집을 의미한다. 바트요는 사람 이름이다. 즉 '바트요의 집'이란 뜻이다. 조셉 바트요는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섬유 사업가였다. 바트요는 중세풍으로 개축한 옆집 카사 아마트 예르를 보고 자신의 집을 독창적으로 고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건축가가 가우디였다.


바르셀로나 서쪽 소도시 레우스 태생인 가우디는 태어날 때부터 폐병과 류머티즘을 앓았다. 다리가 불편해 걸음이 느리다 보니 주변 자연을 잘 관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빛과 곡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카사 아마트 예르와 비교해보면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건물은 둥글둥글한 곡선으로 이뤄져 있고 창문은 큼지막하다. 외부에선 볼 수 없지만 중정이 크게 뚫려 있어 건물 안쪽으로도 자연광이 충분히 들어온다고 한다.


가우디는 건물 안쪽 벽에 푸른색의 타일 장식을 했는데,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진하게 배치했다. 이는 깊어질수록 짙어지는 지중해의 맑은 바닷속을 본뜬 것이다. 유리도 불투명하게 만들어서 물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은 경험을 의도했다.


가우디는 자신이 짓는 건물 자체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주변과의 조화도 고려했다. 가우디는 카사 아마트 예르와 스카이라인을 맞추기 위해 옥탑의 높이를 조절했다.


카사 바트요는 여러 별명을 갖고 있다. 당시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해골 모양 발코니를 보고 '해골의 집' 또는 '뼈의 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지붕이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생각했다(아쉽게도 외부 지상에서 카사 바트요의 지붕을 찍을 순 없었다).


건물은 이후 츄파춥스 사장인 베르나 가문이 사갔다. 베르나 가에선 매년 4월 23일 책의 날, 산 조르디 데이에 카사 바트요 발코니에 붉은색 장미 상화를 장식한다. 실내를 구경하고 싶으면 투어 이외의 시간에 입장료 35유로씩을 내고 들어가면 된다.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에서 카탈루냐 광장 반대편으로 세 블록만 걸어가면 외관이 둥글둥글한 카사 밀라(Casa Mila)를 만날 수 있다. 역시 '밀라의 집'이란 뜻이다. 막상 가보면 카사 밀라보다는 '라 페드레라(La pedrera·채석장)'라고 부르는데, 건물이 돌로 된 산을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재력가 밀라가 자신의 집도 카사 바트요처럼 만들고 싶어서 가우디에게 의뢰했다고 한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영산 몬세라트(Montserrat)에 영감을 얻어 카사 밀라를 지었다. 개인적으론 산보다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가 떠오른다. 발코니 장식은 물 위에 떠다니는 미역을 닮았다. 카사 밀라 역시 곡선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희한하게 당시 스페인은 건물의 외관을 곡선으로 만드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서, 가우디는 카사 밀라를 지으며 많은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카사 밀라

가톨릭에 헌신적이었던 가우디는 카사 밀라의 옥상에 십자가상과 성모 마리아상을 올려놓고 싶어 했다. 그런데 1909년 7월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당시 부패한 종교에 반발한 시위대가 성당과 수도원 등 가톨릭 건축물을 부수고 다녔다. 조각상 설치를 두고 자신들의 집이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한 밀라 측과 가우디가 대립했다. 결과적으로 고도제한 때문에 성모상은 올리지 못했고, 십자가상은 워낙 두툼하게 생겼다 보니 십자가처럼 보이지 않아 화를 피했다고 한다. 가우디가 고용한 건설 노동자들이 건물을 보호해줬다는 얘기도 있다. 어느 건축가가 건축주에 뜻에 반해 자기 맘대로 건물을 지으려 할까. 이것만 봐도 가우디의 고집스런 장인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카사 밀라 옥상엔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도 있다. 정말이다. 카사 밀라 옥상엔 여러 개의 굴뚝 환기구가 있는데, 흡사 투구를 쓴 우주인처럼 생겼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George Lucas)는 바르셀로나 여행 중에 카사 밀라의 굴뚝을 보고 영감을 받아 다스 베이더를 만들었다.


가우디와 밀라 부인은 공사금액 시비로 7년 간의 소송전을 벌였다. 법원은 가우디의 손을 들어줬지만 밀라 부인에겐 돈이 없었다. 그래서 밀라 부인은 카사 밀라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고, 가우디에게 건네고 남은 돈으로는 건물을 마저 지은 뒤 제삼자에 분양해 수익을 얻기로 했다. 하지만 단 3가구만 분양됐고 이후 소유권은 은행으로 넘어갔다.


카사 밀라는 최신 공법으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당시엔 보기 드물게 지하 주차장과 중앙난방, 비데까지 갖춘 최고급 빌라였다. 우리는 나중에 카사 밀라만 따로 내부를 구경하기로 했다.


구엘 공원


구엘 가문은 코미야스 가문과 함께 당시 바르셀로나의 양대 명문가였다. 재력과 예술적인 안목을 두루 갖춘 구엘은 가우디를 포함해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을 후원하고 정치적으로도 활동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우디와 구엘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만났다. 당시 가우디는 초보 건축가로서 발을 내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우디보다 6살 연상인 구엘은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건축가를 찾고 있었다. 구엘은 가우디가 출품한 유리 전시장과 레이알 광장 철제 가로등을 본 뒤, 가우디를 찾아갔다. 가우디의 천재성과 구엘의 재력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만년의 구엘은 바르셀로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산허리에 60여 가구로 구성된 최고급 전원주택단지를 지어 부호들에게 분양할 꿈을 꾸었다. 하지만 구엘 공원은 완성되지 못했다. 가우디의 집과 건물 두 채, 광장만이 지어졌을 뿐이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가 이 땅을 사들였고 공원으로 조성됐다. 이후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구엘공원 입장료 1인당 10유로다. 매표소가 있는 후문으로 들어가면 먼저 가우디의 집이 나온다. 가우디는 2906년 구엘 공원으로 이사해 아버지와 조카와 함께 살며 공원 작업에 매달려 살았다. 1925년 성가족 대성당을 지을 때엔 지하 작업실에 침실을 마련했다고 하니 가우디가 얼마나 일에 헌신했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가우디 집은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구엘 공원 곳곳엔 기둥이 있는데 겉보기와 달리 내부는 단순하지 않다. 기둥의 꼭대기에 식물을 심어놨는데, 뿌리가 기둥 아래로 내려갈 수 있도록 기둥 내부를 비워놨다고 한다. 또 광장 아래엔 86개의 도리스식 열주가 서 있는 아고라가 있는데 이 아래엔 빗물을 저장하는 공간이 있다. 당시 스페인은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빗물을 저장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단 것이다.

광장에선 바르셀로나 시내가 훤히 보인다. 광장 주변으론 유선형의 벤치가 둘러 쳐져 있다. 원색의 타일 조각을 깨트린 조각을 다시 붙인 '트렌카디스 기법'으로 만들어진 벤치다. 재질 자체는 딱딱하지만 앉아보면 편안하다. 가우디는 인체공학적인 가구 제작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건설 노동자들에게 일일이 앉아보라고 한 뒤, 체형 평균을 내서 벤치를 만들었다. 뜨거운 햇살에 지친 우리는 나무 그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커플이 자신 벤치에서 노닥거리는 것을 꼴 보기 싫어했다고 한다.


구엘공원 정면에는 도마뱀을 닮은 조각이 있다. 지하수의 수호신 퓨톤이다. 광장 아래 지하 저장고에 모인 물이 퓨톤의 입을 향해 나온다. 퓨톤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설이 있어서 그런지 구엘공원의 그 어떤 공간 보다도 조각상 앞에서 셀피를 찍기가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퓨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구엘공원의 정문이고, 양옆으로 경비원 숙소와 기념품숍이 있다. 맞은편에 카페가 하나 있는데 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이 떼로 몰려있다. 음료를 주문하면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를 것 같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몬주익

몬주익(Montjuic)의 'Mont'는 산이고 'juic'은 유대인이란 뜻이다. 중세 시대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우리는 밴을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케이블카를 탈 기회는 없었다. 몬주익에 올라가면 바르셀로나 시내가 보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한눈에 보이는데, 가우디는 성당의 높이를 몬주익보다는 높지 않게 설계했다고 한다. 인간의 건축물이 자연보다 높을 수는 없다는 철학 때문이었다나.


몬주익 잔디밭 곳곳에선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놓고 혹은 해먹을 걸어놓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매점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맥주 한잔의 여유를 즐. 나도 투어만 아니었다면 싱그러운 나무 그늘 아래서 적당히 알딸딸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없었고, 대체제를 찾아야 했다.


가이드가 환타 오렌지와 레몬맛을 먹어볼 것을 추천했다. 우리나라 환타는 '오렌지 향' 화합물을 첨가한 거지만, 스페인 환타에는 실제 과즙이 8% 정도 들어가 있어 맛이 다르다고 한다. 속는 셈 치고 매점에서 3유로 짜리 환타를 샀다. 아직 한국에 있는 환타와 비교해보진 못했지만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느낌이 나긴 났다. 그리고 실제로도 스페인에선 환타를 즐기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다.


'몬주익은 무조건 봐야 돼!'라고 추천할 순 없지만, 벅적 시끌한 바르셀로나 시내에 지쳤다면 한 번쯤 이곳에서 한갓진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또 몬주익엔 공영 수영장도 있다고 하니 산 중턱에서 수영을 하는 특별한 경험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 가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바르셀로네타


바르셀로나는 연안 도시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20~30분만 걸어가도 해변이 펼쳐진다.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일광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유럽 사람들을 일광욕을 좋아해서 그런지 옷을 훌렁훌렁(?) 벗고 참 잘 다닌다. 해수욕뿐만 아니라 조깅할 때도,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도 반나체다.

가우디와 연관이 있어서 바르셀로네타에 온 건 아니다. 그저 관광 차원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들렀다. 해변가엔 각종 타파스 바, 카페, 고급 레스토랑 등이 즐비했고 가게마다 손님들로 꽉꽉 차있었다. 깐 마호(Can Majo)라는 해산물 식당의 실내에 자리 잡았다. 야외 테이블도 있었지만 괜히 소매치기도 걱정됐고 무엇보다 더위를 피하고 싶었다. 운 좋게 에어컨도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깐 마호의 실내는 지중해 분위기 물씬 나는 물빛으로 꾸며있었다. 식당 안쪽에 앉으니 해변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잠시 유럽의 한가로운 주택가 골목 같은 느낌이 났다.

이곳엔 국물 빠에야라는 메뉴가 있다는데 '국물'이란 단어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주문을 포기했다. 대신 제일 유명한 메뉴인 먹물 빠에야와 문어 요리를 시켰다. 삶은 문어에 삶은 감자가 곁들여져 나왔다. 초고추장 없는 문어, 매우 어색했지만 먹을만했다. 와이프는 먹물 빠에야를 매우 맛있게 먹었다. 맵고 짠 것을 좋아하는 내 입맛엔 그럭저럭이었다. 우리나라의 고깃집 볶음밥이 생각난다.


다 먹고 나가려니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홀이 손님들로 꽉 찼다. 스페인의 점심시간은 오후 1시부터라고 한다. 하루 다섯 끼를 먹는다고 하는데, 바르셀로나가 워낙 관광지라 외지인들 뿐이어서 그런지 그런 모습까지는 진 못한 것 같다.


우리는 음식값을 치르기 위해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맥주 한 잔까지 곁들인 가격은 66.5유로. 스페인에서 점심치곤 고급지게 먹은 셈이다. 그런데 직원 아주머니가 당황한 표정을 하면서 한 마디 한다. "스페인에서는 자리에서 계산을 합니다." 문화 차이를 숙지하지 못해 오해를 살 뻔했다.


커피를 마시러 적당한 노천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얼음 들어간 커피 두 잔 달라"라고 했더니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얼음 담긴 유리잔이 나온다. 스페인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개념이 없는 거 같다. 그래서인지 다른 손님들은 얼음잔에 콜라나 환타를 시키든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스페인에 왔으니 해수욕을 한 번 해야겠는데 바르셀로네타의 광경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래사장은 빈자리 찾기 어려울 정도고, 곳곳에 잡상인들도 많았다. 자리를 잡는다 해도 물에 들어가 노는 사이 소지품을 도난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어쨌든 지금 해수욕을 할 건 아니었으니, 차차 전략을 세워보기로 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대성당)

가우디가 인생과 돈을 모두 쏟아부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현재는 동서남북 파사드가 어느 정도 올라가 있는 상태인데 가우디는 이 가운데 탄생의 파사드 중 첨탑 하나만 건축하고 생을 마감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 사후 그의 제자들의 손에 의해 지어지고 있다. 상기했듯 높이가 172.5m로 몬주익 산에 맞먹다 보니, 성당이 모두 담기도록 셀피를 찍기가 쉽지 않다.


나는 가톨릭 모태신앙으로 어린 시절 미사 시간에 신부님 시중드는 복사도 몇 년간 했다. 구약과 신약성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각 파사드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어렵지 않았다. 가우디가 지은 탄생의 파사드엔 아기 예수의 탄생 과정이 담겨있다.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님에게 수태고지를 하는 모습, 동방박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암시하는 별을 따라 마구간으로 오는 장면, 아기 예수의 탄생 등이 조각돼있다.


시커멓게 때가 탄 다른 부분과 달리 우윳빛으로 된 조각들은 일본인 조각가가 비교적 최근에 만든 작품이다. 해당 조각가는 가우디를 30년 이상 연구했다고 한다.

반대편 수난의 파사드엔 예수가 박해를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사흘 만에 부활해 승천하는 과정들이 조각돼있다. 스페인의 또 다른 거장 호세 마리아 수비라치 작품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조각(세 번째 사진)엔 가우디의 얼굴이 등장한다. 예수의 얼굴이 찍힌 베일을 들고 있는 성녀 베로니카를 중심으로 정반대 편에서 예수를 근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조각상은 어딘가 이상하다. 십자가가 지면에 수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면과 평행하게 누워있는 모양새다. 그런데 십자가상이 매우 높은 곳에 있다보니, 올려다보는 시선에선 일반적인 십자가상으로 보인다. 한 번쯤은 예수를 우러러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수난의 파사드가 노을에 붉게 물들 때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며 숨을 거둔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는 확인사살을 당한다. 군사 롱기누스는 그의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러자 선혈이 사방에 튄다. 롱기누스는 시력이 좋지 않았는데, 눈에 묻은 예수의 피를 닦아내자 앞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롱기누스는 그때부터 예수를 섬기며 살았다고 한다.


네 번째 사진은 예수가 사흘 뒤 부활해 승천하는 모습이다. 그밖에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 가리옷 유다의 배신, 본디오 빌라도 총독, 주사위로 예수의 옷가지를 나눠갖는 병사들 등 다양한 조각상이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내부를 관람하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별도의 매표소는 없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애플리케이션을 받은 뒤 결제해 QR 코드를 받으면 된다. 1인당 26유로인데 옥상을 올라가 본다든지 가이드를 신청하면 더 비싸진다. 그런데 옥상은 아무 때나 관람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그런데 성당 내부는 정말 꼭 봐야 한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황홀경을 선사한다. 탄생의 파사드 쪽은 푸른색 계열로, 수난의 파사드 쪽은 붉은색 계열이다. 붉은색 스테인드 글라스가 엄숙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실제 미사에 참여하면 매우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에 성인의 이름과 세례명이 적혀 있는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있다. 천장은 마치 동물의 척추뼈 같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거인의 뼈를 올려다 는 느낌이다. 기둥 곳곳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힌 장식이 달려있다. 내 세례명인 베드로(Peter)를 찾으려 애썼지만 왜때문인지 찾을 순 없었다.




글은 마치 내가 신실한 신자인 것처럼 써놨지만 사실 냉담 십수 년째 '죄인'이다. 대학에 들어가 과학을 전공하면서 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 이후 세상에 온갖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걸 보며 신은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앞에 모든 의미가 새로워다. 유다의 배신, 채찍질에 피를 쏟은 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모습을 가우디와 수비라치의 조각을 따라 음미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받쳐 눈물을 쏟을 뻔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예술이 주는 감동은 머리 아닌 가슴으로 오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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