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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첸 Apr 03. 2019

#21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유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비 오는 날은 다른 날보다 유독 아침잠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창문에 소란스레 부딪히는 빗줄기와 아직 어두컴컴한 하늘빛이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비 오니까 일 안 하겠지?”


  침대 위에 아직 누워있던 수빈이는 전날 밤 일기예보에 뜬 비 소식을 보고 기뻐했었다.


  “모르는 일이야. 그래도 나갈 준비 해. 시간 다 됐어.”


  여행 매니저 혹은 가이드나 다름없던 나는 어기적어기적 바지를 주워 입고 바깥 상황을 살피러 나갔다. 계단을 내려오자 니콜라가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오네요.”


  나는 은근히 밖에서 일하기 어렵겠다는 뜻을 먼저 내비쳤다.

  하지만 니콜라는 비가 오는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되려 일거리를 소개해주겠다며 내게 우산을 건넸다. 먹구름에 가려 음침한 하늘 아래 무엇을 하게 될지 조금은 염려되었지만 일단 문밖을 따라나서 보았다. 

  빗줄기 사이로 퇴비장 방향에서부터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가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이삿짐센터 크레인 같은 기계가 우악살스레 나무더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무를 분쇄해서 퇴비로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밭에 쓰기도 하지만 지역주민들에게 일부분 팔기도 해요.”


  잘은 나무 조각과 함께 쏟아지는 거대한 소음은 온몸을 긴장시켰다.


  “나뭇가지들을 나르려면 포크가 필요할 거예요. 어디 있는지는 알죠?”


  “네???”


  설마 이 비에 이 일을 하라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게 오늘 할 일이에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요? 다른 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쩔 수가 없어요. 기계 대여가 오늘밖에 안 된다고 해서 오늘 꼭 해야 해요.”


  니콜라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치켜뜨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파란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욱더 차가워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왔구나~ 무슨 일 한대니?” 


  엄마는 소파에 앉아 성경책을 보다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일 좀 힘들 거야. 비 맞고 해야 하니까 바깥에 우비 하나씩 챙겨.”


  “무슨 일인데?”


  뒤에 있던 아빠가 물었다.


  “나무 분쇄하는 일 하래.”


  아직도 귀에서 기계소리가 웅웅 거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 해야 한다고? 물어본 거 맞아?”


  엄마가 되물었다.


  “아. 그럼 물어봤지, 안 물어봤겠어?? 지금 해야 한대!”


  하기 싫은 일을 설명하려니 짜증이 묻어났다.               



    





  아빠는 밖으로 나와 빗속에 작동 중인 분쇄기를 보며 한층 더 심각해졌다. 


  “이 일 위험하니까 일단 엄마랑 수빈이 데리고 들어가.”


  나는 아빠 말을 무시했다. 매번 아빠 혼자서 궂은일 도맡으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아빠랑 말을 주고받는 것도 불편했기에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기도 싫었다. 


  “난 할 거야.”


  “이 일을 어떻게 하니? 엄마랑 수빈이는 다른 일 해야 한다고 가서 말해.”


  “왜 못 해? 정 그러고 싶으면 아빠가 알아서 해. 난 할 거니까.”


  나의 완고함을 아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곧장 포크를 들고 와 멀찍이 떨어져 나무를 퍼 나르기 시작했다. 한편 우산을 쓰고 대문 쪽에 서 있기만 한 엄마와 수빈이가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못 본 척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수빈이를 챙겨야 했다. 

  둘은 니콜라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상했던 건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수빈이는 엄마 옆에 가만히 있고, 엄마가 서툰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몰라, 언니. 이 사람 진짜 이상해. 우비가 하나 모자라서 우비 달라고 내가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겠대.”


  “레인코트!”


  “What?”


  “레인코트!!”


  니콜라는 우비가 없다는 말을 연이어 알아듣지 못했다. 엄마의 구수한 한국식 발음 탓이 아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니콜라는 이미 인상 쓴 얼굴로 귀를 닫은 지 오래였다.


  “엄마, 됐어. 그만 말해. 그냥 내가 찾아줄게.”


  안하무인인 니콜라의 태도에 나는 그만 화가 나버렸다. 나는 온 집안을 허락 없이 맘대로 휘저으며 우비를 찾아냈다.


  ‘아빠 말대로 엄마랑 수빈이는 다른 일 하게 할 걸 그랬나….’


  니콜라의 무시하는 듯한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급격하게 우울해진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는 계속해서 쏟아졌고, 한 덩이 집어 든 나무더미는 비에 젖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검은 우비로 무장한 엄마와 수빈이는 의외로 별생각 없다는 듯이 일에 합류했다. 수빈이는 몸집에 비해 큰 우비를 입고 큰 갈퀴를 들고 일하는 엄마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웃고 또 웃었다. 엄마도 수빈이가 웃으니 따라 웃었다.

  그에 반해 나는 오기를 다 했다. 아빠한테 이 정도 일쯤은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무리 없이 해낸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빠를 제외한 우리 셋은 커다란 더미를 질질 끌어다 기계 옆에 가져다 놓았고, 아빠는 그 더미들을 기계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쪽으로 더 오지 마! 위험해!”


  콧잔등에 나무 찌꺼기가 튀어 검게 얼룩진 얼굴을 한 아빠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기계 옆에 오면 덜덜거리는 기계음보다 크게 소리쳤다.

  졸지에 비 맞으며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가족은 말 한마디 없이 잔나무를 나르고 또 날랐다. 엄마랑 수빈이도 이제 지쳤는지 연거푸 시간을 확인했다. 힘이 들면 잠시간 헛간 처마 아래에 꾸부정하게 앉아 쉴 뿐, 낡은 우비 사이로 스며든 빗물은 입고 있던 옷을 적셨다.

  니콜라는 말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 열 명도 넘는 공동체 식구들은 일하는 동안 얼굴 한 번 보이지 않고 단 두 명만 있었다.


  “아, 진짜 말이 돼? 중요한 일이라면서 자기네들은 하나도 안 하고!”


  수빈이 말처럼 이 사람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했다.     









19세 여동생은 학교를 자퇴하고,
53세 엄마는 교회를 그만두고,
55세 아빠는 밭을 맡기고,
26세 나는 가족과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성질부리는 큰 딸이 302일 간 기록합니다.


숨겨둔 장면은 여기에서
https://www.instagram.com/travel_of_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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