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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첸 Apr 06. 2019

#22  다- 내 탓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 우리 가족은 각자 방에서 휴식시간을 가졌다. 바깥에서는 몰랐던 한기가 온몸을 타고 느껴졌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말리던 내게 엄마는 잠시 대책회의를 제안했다.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금방 나갈 사람처럼 방문 앞에 서서 물었다.


  “여기 일정표 보면 볼런티어 주간이라고 쓰여있어. 그 사람들한테 우린 우퍼가 아니라 볼런티어인 거야.”


  아빠의 말인즉슨 교류를 위한 만남이 아닌 긴급한 일거리에 쓰일 노동력으로서 우릴 본다는 의미였다.


  “다른 곳 같으면 이렇게 비 오는 날 일 안 하는데, 여긴 정말 너무 배려가 없어.”


  엄마는 속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거긴 거기고 여긴 여기야. 다른 곳이랑 비교하지 마. 오후 일을 어떻게 할지만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나는 부정적인 평가만 하는 가족들이 싫었다. 이 일이 우리에게 무리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오후 일을 어떻게 해! 진짜 오후에도 저 일 하라고 하면 대박이다 진짜!”


  수빈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 못 한다고 해. 은빈이 네가 이번에도 말 못 하겠다고 하면 내가 가서 말하면 돼.”


  아빠는 완강한 입장을 표했다.


  “됐어. 내가 말해.”


  아빠에게 맡겼다가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혼자 방으로 돌아온 나는 으슬으슬 떨며 서둘러 라디에이터 곁에 쭈그려 앉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열기에 손가락 끝만 데우는 꼴이었다.


  ‘짜증나. 왜 이거 가지고 난리야? 일하기 싫었으면 중간에 그만두던가. 일 하기로 했으면 그냥 하면 돼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이미 끝난 거 불평불만하면 뭐가 달라져?’


  가족들의 볼멘소리는 내게 악영향일 뿐이었다. 나도 힘들었다. 차라리 차분하게 이야기했다면 이렇게까지 불편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호스트와 우리 가족 사이를 소통해야 하는 중간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무조건 가족들 편에 있지 않았다. 어딜 가나 가족보다 호스트가 사는 문화와 방식을 이해하고 맞추려는 자세가 1순위였다.

  붉으락푸르락하는 화를 속으로 내지르며 상황을 돌이켜보다 별안간 니콜라의 차가운 눈빛이 떠올랐다.


  ‘맞아. 다 그 인간 때문이야. 저번에도 우리한테 일거리 소개해주고 자기는 쏙 빠지더니 혼자 노래 부르면서 개랑 산책하고. 우리가 자기네 일 해주는 하인인 줄 아나!’


  열 받은 마음이 화르륵 타오르더니 갑자기 푹 꺼졌다.


  ‘정말 힘들다. 여행 그만하고 싶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창문에 투닥거리는 빗소리가 뾰족한 바늘처럼 변해 내 마음을 찌르는 듯했다.


  ‘박은빈, 네가 오자고 한 공동체야. 네가 이렇게 여행하자고 했잖아. 아빠 말 듣고 니콜라에게 더 강경하게 이야기했으면 이렇게까지 가족들 안 힘들었어. 다들 감기 걸려서 아프면 네가 책임질 거야?’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표독스레 나를 노려보았다. 왜 너는 그것밖에 못 하냐며 타박했다. 나는 나에게 더 가혹하게 굴었다.            



 





  오후 일을 시작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니콜라 어디 있어요?”


  나는 혼자 울다 퉁퉁 부은 눈을 들킬까 고개를 숙이며 우연히 마주친 루시에게 물었다.


  “모르겠네. 왜요?”


  아무런 영문을 모르는듯한 루시의 밝은 대답에 불쑥 화가 났다.


  “오후 일에 관해서 말할 게 있어요.”


  “아. 오후에는 니콜라 말고 나랑 일하는 거니까, 나한테 말해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오후 일은 어렵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래요. 푹 쉬어요.”


  예상보다 너무나 간단하게 원하는 대답을 들었지만, 방으로 돌아온 내 맘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니콜라가 우리더러 일 안 하고 꾀부리는 사람들이라고 험담하는 건 아닐까.’


  혼자 침침한 방안에 누워있으니 생각만 커졌다.

  똑똑.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 안 춥니? 어머! 히터가 작동이 안 되네. 고장 났나 봐. 괜찮니?”


  “괜찮아. 냅둬.”


  “괜찮긴, 딱 봐도 춥고만. 내가 이거 고쳐달라고 말할게.”


  엄마의 호들갑이 시작되었다.


  “그냥 내버려 두라고.”


  난 공동체 사람들이든 엄마든 그 누구와도 마주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참, 은빈아 있잖아. 아무래도 다음 장소 호스트한테 엑서터Exeter에서 픽업해달라고 하는 게 좋겠어. 좀 쉬고 나서 전화나 메일 좀 보내줘.”


 며칠 전에도 엄마의 요청으로 픽업 장소를 바꾸었는데 또 바꾸자는 소리였다. 우리 편의만 생각하며 호스트와의 약속을 번복하는 엄마의 태도에 다시 짜증이 일었다. 하물며 장소가 바뀌면 나도 다시 교통편을 알아봐야 했다.


  “엄마가 알아서 해. 제발 좀 나가줘.”


  나는 등을 돌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엄마도 내 목소리에 실린 무언의 감정을 읽었는지 아무런 말 없이 서 있다 방을 나갔다.

  하지만 잠시 후 엄마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옆방에서 지내는 던의 목소리도 들렸다. 엄마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 방에 히터가 고장 났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난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필요 없어요.”


  나는 딱 잘라 던에게 말했다. 던은 아리송하여 나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나는 도로 문을 쾅 닫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곧장 엄마가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박은빈, 이야기 좀 하자. 엄마 방으로 좀 와.”

  








19세 여동생은 학교를 자퇴하고,
53세 엄마는 교회를 그만두고,
55세 아빠는 밭을 맡기고,
26세 나는 가족과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성질부리는 큰 딸이 302일 간 기록합니다.

숨겨둔 장면은 여기에서
https://www.instagram.com/travel_of_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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