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진부하면서도 로맨틱한 말
가장 최근에 했던 두 번의 연애에서 모두 실패했다. 두 번 다 연락 문제가 도화선이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출근 잘 했어?", 점심 시간 되면 "점심 맛있게 먹어~", 퇴근하고 나면 "오늘도 좋은 저녁 시간 보내~" 해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주지 않아서 상대방이 서운해했고, 결국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가지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헤어졌다.
그땐 그녀들이 유별나다 생각했는데 주변 얘기들을 들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하루 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있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자들은 보통 남자 친구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 밥 먹었니, 잘자, 하는 뻔한 연락이라도 주고 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뻔한 걸 못해서 헤어졌다. 고집을 부리려던 건 아니다. 여자 친구가 해달라는데 그까짓 카톡 보내주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그런데도 끝내 그걸 하지 못한 이유는, 그렇게 하다가 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들 때, 하지만 아직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서 할 얘기가 없을 때 남자들은 보통 저런 카톡을 보낸다. 하지만 여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왜 저런 뻔한 소리를 하는지 다 안다. 밥 먹었는지, 출근 잘 했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나한테 마음이 있어서 연락한 거라는 걸 다 안다. 이 관계에서 내가 우위에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남자가 원하는 걸 쉽게 주지 않는다. 남자는 "밥 먹었니?"라고 물었을 때 "네, 오빠! 저는 오늘 친구랑 피자 먹었어요. 오빠는 뭐 드셨어요?"라고 대답해주길 바라지만, 그 뻔한 질문으로부터 대화의 물꼬가 트이길 바라지만 여자들은 대개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 점심 먹었냐고 물어봤는데 저녁 먹을 때쯤 답장이 온다. 남자는 15초만에 답장을 보내고, 여자는 다음날 아침쯤 답장을 보낸다. 2시간, 4시간, 8시간. 답장의 간격은 2의 n승으로 늘어나고, 결국에는 끊겨버린다. 병상에 누운 환자의 심박수가 점점 더디게 뛰다가 결국에 삐!삐! 소리를 내며 끊겨버리듯이.
그런데 여자는 자기가 마음에 들어하는 남자가 그런 뻔한 소리를 해주길 바란다. 그 뻔한 말을 안해준다고 서운해하고, 그러다 헤어진다. 그래서 남자들은 혼란스럽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일어났는지 물어봐달라고? 보통 그렇게 하면 망하던데?
결국에는 여자의 마음에 달린 것일 게다. 뻔한 소리를 한다는 건 관심의 표현이다. 딱히 너에게 연락을 해야 할 명분은 없지만, 너를 빵빵 터뜨리게 해줄 대화 소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뻔한 소리라도 해서 너와 친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안 좋아하는 남자가 이런 표현을 하는 건 여자의 입장에서 곤욕스러운 일이다. 너무 친절하게 받아주었다가는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해서 고백 공격을 해버릴 수도 있고, 그렇다고 너무 매몰차게 거절해버리기에는 좀 미안하다. 어쨌거나 그 남자는 선의로 연락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내가 좋아하는 남자라면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그런 뻔한 말이라도 주고 받고 싶어할 정도로 내게 관심있어 하는 건 너무나 기쁜 일이다. 반대로 남자가 뻔한 말을 해주지 않는 건, 내게 용건이 있을 때만 연락한다는 건 나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자들이 그런 카톡을 보내는 남자를 극혐하면서도 막상 자기 남자 친구가 그런 카톡을 보내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자의 입장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여자가 날 너무 좋아해서 그런 뻔한 말이라도 듣고 싶어하는 거라면, 그런 뻔한 말을 해도 내게 질려하지 않을 거라면 몇 번이든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바로는 그렇지 않았다. 대개의 여자들은 그런 카톡을 보내는 남자를 재미없고 매력없게 느꼈다. 잘 되어가던 사이더라도 그런 연락을 주고 받다보면 망했다. 어쩌면 망해가는 사이라서 그런 연락을 주고 받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뻔한 소리를 하지 않고서는 주고 받을 소재가 없는 사이라서 그랬던 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저런 카톡을 보내고 잘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서 헤어졌다. 나는 내가 이런 뻔한 소리를 해도 네가 좋아해줄 거라는 걸 믿지 못했고, 너는 내가 이런 뻔한 소리를 하지 않아도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믿지 못했다. 나는 너를 못 믿었고, 나도 너를 못 믿었다. 그렇게 말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