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 19기 모태솔로 특집, 영자를 리스펙하는 이유
내가 연애를 할 때 제일 먼저 거르는 여자는 힙스터다. 남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쉽게 하는 걸 '걸크러시'라고 착각하는 여자,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자 따위 필요없다고 하는 여자, 외국 좀 나가보고 이태원에서 양놈들이랑 술잔 좀 섞어본 것 가지고 무슨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양 떠들고 다니는 여자를 나는 극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수없어서다. 저런 여자를 보면 '지가 뭔데? 왜 나대?' 하는 생각이 든다.
질투라는 감정은 무엇인가? 내가 가져야 마땅한 걸 남이 가졌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손흥민은 엄청난 부와 명성을 누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흥민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가 그런 것들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자기의 모든 것들을 걸어서 싸워왔는지, 그 과정을 통해 그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자기 절제와 승부사 기질, 리더십 같은 것들을 길러왔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반면 나보다 별로 잘 생기지도, 키가 크지도, 돈이 많지도 않은 친구가 예쁜 여자를 만나는 걸 보면 질투심이 든다. 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매력적인 여자를 만날 정도로 대단한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나에게 주어졌어야 할 무언가를 나보다 잘난 것도 없는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질투심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19기 모태솔로 영자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빨간 머리에 걸걸한 목소리. 예사롭지 않은 패션 감각. 남자가 얼마를 벌든 상관없다, 자기가 벌어먹이면 된다는 호언장담. 그녀는 온몸으로 힙스터의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대부분의 힙스터는 가짜였다. 자기보다 힘이 없고 지위가 낮은 남자들 앞에서는 솔직당당한 걸크러시를 외치던 여자들이 직장 상사나 돈 많은 남자 앞에서는 전형적인 요조숙녀가 되는 걸 너무나 많이 봤다. 외국 나가서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여자들과 말을 섞어보았을 때, 그녀들로부터 정말 놀라운 인사이트를 발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영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딱 보니 13기 현숙 짭이네?
그래서 질투가 났다. 사실 나는 힙스터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삼십대 중반이다. 아저씨다. 주변 동갑내기들을 보면 다들 꿈 같은 건 잊어버린지 오래다. 결혼하고 애 낳고 직장 다니는 게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로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여전히 도전하고 있다. 아무리 삶이 팍팍해지더라도, 아니면 다른 목표들이 생기더라도 나는 이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늦더라도, 아니 어쩌면 평생 닿지 못할 지라도. 그런 점에서 나는 힙스터다.
하지만 그런 나의 정체성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단정한 옷차림에 단정한 머리 모양. 겸손하다 못해 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 말투. 그런 것들로 숨긴다.
나는 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될 꺼야. 언젠가는 내 글이 직장에서 받는 내 연봉보다 비싸게 팔리게 될 날이 올 거야. 나는 대한민국이 알아볼 정도의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이런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19기 영자를 보고 재수없다고 느꼈다. 뭔데? 왜 저러고 다니는데? 지가 뭐 돼?
그런데 알고 보니 정말 뭐 되는 사람이었다. 네이버에 정식 연재 중인 웹툰 작가였다. 찾아보니 순위도 꽤 높았다. 7년 동안이나 장기 연재 중인 작품이었다.
순위가 중요한 건 아니다. 네이버 웹툰의 순위는 작품성과 비례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놀라운 인사이트, 독특하면서도 치밀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영자가 네이버에 연재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자가 훌륭한 만화가라는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영자보다 더 만화를 잘 그리는 사람이 베스트 도전도 못가고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허우적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7년 동안 한 작품에 매달려온 그녀의 노력은 진짜다. 주변 친구들이 취직해서 월급받고 차 사고 전세집 마련하는 동안에도 웹툰이라는 불확실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근성과 배짱도 진짜다. 영자는 진짜 힙스터다.
그래서 영자를 보고 존경심을 느꼈다. 영자가 여기에서 커플이 될지 말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영자가 걸어온 길을 존경한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게 될 삶의 길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