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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Mar 03. 2024

매력으로 외모를 극복할 수 있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운 순자와 영철

뭐야, 장난하나?



나는 솔로 19기 모태솔로 특집에서 순자(1990년 생, 노인복지센터 운영)가 처음 등장할 때 들었던 생각이다.


외모는 예선, 성격은 본선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 번째는 희망적인 메시지다. 일단 본선에만 진출하고 나면 예선에서의 성적은 크게 중요하지 않듯, 외모는 최소한의 커트라인만 넘어가면 된다는 뜻이다. 본선에서는 매력과 성격이 중요하기 때문에 특출나게 잘생기거나 예쁘지 않아도 충분히 연애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편 두 번째 의미는 조금 더 절망적이다.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예 본선 무대에 오를 수도 없듯 외모에서 상대방의 최소한의 커트라인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리 성격이 좋고 매력이 있다 해도 그 장점들을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순자는 남자들이 보기에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통통한 몸매다. 요즘 세상에서 감히 여자의 몸매를 언급하는 건 금기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내 표현이 지나치다 할 것이다. 너는 얼마나 잘났길래 그까짓 살 좀 찐 걸로 순자처럼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평가절하하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키가 165cm가 안 되거나, 심하게 뚱뚱하거나 왜소한 체형을 가진 남자와 사귈 수 있느냐고 물으면 난색을 표할 거다. 다들 아는 거다. 외모는 중요하다는 걸. 본선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적어도 예선에서는 절대적이라는 걸.

뭐야, 장난하나?


그래서 순자를 처음 보고 이 생각이 들었다. 순자의 소개 멘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운"이다. 아니나 다를까 순자가 처음 등장할 때 엠씨들은 순자가 원피스와 가방, 캐리어까지 핑크색으로 깔맞춤을 했다며, 걸음걸이 말투 하나 너무 귀엽다며 탄성을 내질렀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그렇긴 했다. 순자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보고만 있어도 아빠 미소가 지어지게 만드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이건 연애 프로그램이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가 짝을 찾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니까 마냥 귀엽기만 해선 안 된다. 짝짓기,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섹시해야 한다. 여리여리한 골격과 하얀 피부, 탄력있는 가슴과 엉덩이.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순자에게는 그게 없다. 그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운"이라는 소개 멘트와 엠씨들의 감탄사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귀엽다고? 사랑스럽다고? 그렇긴 하지. 근데 그래서, 데프콘이나 이이경, 당신들은 순자를 만날 거야? 아니잖아? 사실 당신들도 다 알잖아? 노노카짱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렇다고 노노카짱과 연애를 할 수는 없다는 걸.

연애 프로그램에 필요한 건 이런 귀여움이지 저런 귀여움이 아니다. 여기서 '이런'과 '저런'이 무엇인지는 설명 안해도 다 알 거다.





그런데 첫 데이트를 보면서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순자의 첫 데이트 상대는 영철(87년생, 식품회사 근무)이었다. 둘은 영철의 차를 타고 고깃집에 갔다. 영철은 쌈도 싸주고, 안전벨트도 채워 주고, 소소한 스킨십도 했다. 서툴지만 자신감있고 진솔한 면모를 보였다. 순자도 시종일관 밝은 모습으로 받아주었다. 모태솔로 두 사람의 첫 데이트였지만 어색함이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순자는 영철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며 장나라의 '나도 여자랍니다'를 불렀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내가 만났던 여자가 나에게 노래를 불러준 적도 없었고, 주변 친구로부터 그런 얘길 들은 적도 없었다. 자기 말만 들으면 레이싱 모델이나 걸그룹 지망생 같은 여자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연애 유튜버들도 첫 데이트에서 여자가 노래를 불러줬다는 얘길 한 적은 없었다. 그것도 '나도 여자랍니다'를. '나도 여자랍니다. 그대 곁에 있을 때면 부드럽고 약해지는 마음. 누구를 사랑한다면 다 그렇잖아. 난 갖고 싶어. 그대의 마음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봐요. 멀리서 찾지말아줘. 그대 사랑은 바로 나.'라는 노래 가사를.


순간 영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걸 보며 나는 상상했다. 저 때 영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영철이 원래 원했던 여자는 영숙(89년생, 학원강사)이었다. 영숙은 순자보다 훨씬 날씬했고 예뻤다. 예선전을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을 법한 외모를 가졌다. 하지만 영숙이 영철에게 '나도 여자랍니다'를 불러주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영숙이 아닌 어떤 여자라도 그런 걸 해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순자는 해줬다. 세상에 어떤 남자도 받아보지 못한 이벤트를 받았고, 들어보지 못한 메시지를 들었다. 그 순간 영철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유능한 남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외모는 예선, 성격은 본선


그래서 내 생각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성성의 본질은 경쟁이다. 남성은 강한 성욕을 타고 났다. 그래서 여자를 두고 경쟁한다. 누군가는 여자에게 선택받고 누군가는 버려진다. 하지만 선택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더 젊고 강한 수컷이 나타날 걸 알기 때문에. 그러면 자기는 버려질 거란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남자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서 여자를 차지하려는 욕망과 결국 자기는 그 경쟁의 최종 승자가 되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인정을 갈구한다. "당신은 최고야", "당신은 멋져", "당신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어"하는 말들을 듣고 싶어한다.


그날 순자가 영철에게 준 건 어쩌면 모든 남자들이 원하지만 아무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걸 잃어도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여자, 약해진 모습을 보였다고 떠나지 않을 여자,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믿고 응원해줄 수 있는 여자. 그런 여자라면 살집이 조금 있다한들 크게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번 기수에서 순자가 최종 커플이 된다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갖고 있던 연애에 대한 고정 관념을 바꾸어야만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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