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기 영수(86년생, 소아청소년과의사)의 자기소개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 근무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운 신생아들에게 건강한 삶을 선물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단순히 돈이나 사회적 지위, 그리고 여자를 얻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게 아니라 생명을 대하는 일에 대한 소명의식과 책임감을 갖고 일하는 참된 의사라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매력적인 자기소개였다.
그런데 막상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걸 보니 웬 학벌 얘기만 한다. 영자(94년생 롯데 멤버스)와의 첫 데이트에서는 자기를 왜 택했냐는 영자의 질문에,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학벌이 좋을 줄 몰랐다."라는 대답을 했고, 숙소에서 정숙(87년생 LG전자)과의 대화에서는 학창 시절에 1등만 했다는데 그럼 어디 대학나왔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이후 현숙(87년생 아모레퍼시픽 연구원)과의 데이트에서도 학벌 이야기를 한다. 생명을 살리는 참된 의사와 학벌만 따지는 속물, 영수의 본모습은 무엇일까?
번화가에 나가서 상가 건물을 보라. 순대국밥집도 있고, PC방도 있고, 스크린골프장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상호에 대학 이름이 들어간 게 몇 개나 있나? 거의 없을 거다. 연세순대국밥, 서울베이커리, 고려찜질방, 성균관세탁소. 척 들어봐도 이상하지 않나?
이런 일들을 하는데는 학벌이 별로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연세대 나왔다고 순대국밥 잘 만드는 게 아니고, 서울대 나왔다고 빵이나 떡볶이를 잘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 회사원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연세대 행정학과를 나왔다. 상위 0.1%, 전과목 1등급의 수능 성적표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제약회사에서 영업을 한다. 이 일을 할 때는 내가 명문대를 나왔다는 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졸이건 연세대 출신이건 우리 회사 제품을 쓰지 않는 신규 병원에 방문하면 입구컷 당하는 건 똑같다. 프론트에 앉아 있는 간호조무사에게 제발 원장님 좀 만나게 해달라며 굽신대야 하는 건 똑같다. 연세대를 나온 원장님께 "원장님, 저도 실은 연세대 행정학과 나왔습니다."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 제품을 써주는 것도 아니다. 아마 원장은 '그래서 어쩌라구요?'하는 눈빛을 보낼 것이다.
영업직만 그런 게 아니다. 사무직도 똑같다. 서울대를 나왔건 연세대를 나왔건 처음 들어온 신입사원은 모두 다 바보다. 막스 베버의 사회학 이론이 어쩌고 케인즈의 경제학이 어쩌고 하는 건 일할 때는 아무 쓸모가 없다. 복사기 돌리는 법, 엑셀 파일에 SUM함수 넣는 법부터 새로 배워야 한다. 그러니까 학벌은 중요치 않다. 융통성과 눈치, 사교성, 호감형의 외모 같은 것들이 차라리 더 중요하다. 학벌은 내가 학창시절에 선생님 말 잘 듣고 야자 땡땡이 안 치면서 공부 열심히 했다, 그러니 회사에서도 팀장님 말 잘 듣고 무단 결근 안 하고 열심히 일할 거다, 하는 정도의 최소한의 증명이 될 뿐이다.
그래서 사회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대개 학벌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학도 안 나온 녀석이 연세대 나온 나보다 영업 실적 잘 나오고 인센티브 많이 받는 걸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된다. 일 머리와 공부 머리는 다르다는 걸. 일머리 나쁜 내가 그나마 대학이라도 좋은 데 나와서, 한국 사회가 그런 껍데기에 집착하는 사회라서 이만큼이라도 벌어먹고 사는 거라는 걸.
그런데 병원 이름에는 유독 대학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고려정형외과, 연세이비인후과, 서울내과, 하는 식이다. 원장님이 고려대를 나왔으면 병원 이름에 '고려'를 붙이고, 연세대를 나왔으면 '연세'를 붙인다. 그런 업계가 딱 하나 더 있다. 학원이다. 연세학원, 고려수학학원, 서울영재아카데미. 동네에 다 하나씩은 있지 않나?
병원과 학원에서는 학벌이 실질적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는 많은 것들을 배운다. 전공 수업도 듣고 교양수업도 듣고 조별과제도 하고 레포트도 쓰고 시험도 보고 동아리나 대외 활동도 하고 축제나 일일주점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회 생활에 별 쓸모가 없다. 회사에 들어가서는 모든 것들을 새로 배워야 한다. 하지만 의사는 다르다. 의대에서 배운 지식으로 환자들의 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린다. 학원 강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쌓아왔던 교과 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과거에 자기들이 들어갔던 명문대에 보낸다. 그게 이들의 실적과 커리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어느 대학 나왔는지가 중요하다. 서울대 의대에서 배운 의사와 지방대에서 배운 의사가 있다면 누구를 더 신뢰하겠는가? 지방대 나온 학원 강사가 댁의 아들을 서울대로 보내줄테니 저만 믿어달라고 한다면 어느 학부모가 믿겠는가?
물론 의사나 학원 강사들에게도 학벌이 전부는 아니다.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해도 현장에서 수십 년 동안 산전수전 겪은 베테랑 의사만큼 진료를 잘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대 나온 27살짜리 초임 강사가 1타 강사 현우진이나 정승제만큼 수학을 잘 가르칠 수는 없을 것이다. 공무원 한국사 전한길처럼 명문대를 나오진 않았지만 강의력만으로 인정받은 강사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최소한 모든 지식을 갖춘 상태로 일을 시작한다. 초임 의사라고 베테랑 의사들이 아는 의학 지식을 모르진 않는다. 의대에서 다 배우고 들어온다. 다만 환자와 상담하고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능력, 간호사들과 협업하는 능력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27살 초임 수학 강사나 현우진, 정승제나 수학 지식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걸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능력, 학생들을 동기부여하고 집중력을 끌어내는 능력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들에겐 선생님의 칭호가 붙는다. 의사선생님. 수학선생님. 동료 의사들 사이에서는 풋내기 신입일지라도 적어도 이들의 고객인 환자나 학생, 학부모들 앞에서는 이들은 선생님이다. 다른 직업들은 그렇지 않다. 신입 사원을 선생님이라 불러주는 직업은 없다.
그들에게 학벌이 중요한 건 그래서다. 일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대학이란 그냥 등록금 내고 졸업장 준 곳, 이력서 학력 기재란에 한 줄 추가해준 곳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는 환자들의 병명을 진단하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데 필요한 지식, 그리고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부여해준 곳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나솔사계에 나왔던 고려대학교 공대 출신 수학 강사인 남자3호가 9기 옥순의 변호사 지인을 "지방대 로스쿨 나온 급 떨어지는 애"라며 저격했던 적이 있다. 이질감을 느꼈다. 변호사면 지금 변호사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가 중요하지, 어디 로스쿨을 나왔는지가 중요한 건가? 왜 별로 안 중요해 보이는 걸로 급을 나누는 거지? 그리고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 사람의 세계는 아직 고3 교실 뒷편에 붙어있는 배치표에 머물러 있구나. 인생 살면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수능 등급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구나.
나도 학원 강사를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기업이라는 거대 시스템의 부품으로서 소모되는 삶을 사느니 내 개인 기량으로 당당하게 세상과 맞짱뜨고 싶었다. 글을 쓰는 재능을 살려 논술 과목을 가르쳐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냥 두려웠던 것 같다. 연세대생이라는 나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학벌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야생의 세계로 나가서 새로 시작하는 게 두려웠다. 복사기 돌리고 세절기 봉투 비우는 법 새로 배우느니 차라리 연세대라는 스펙이 통하는 세상에서 연세대 나온 논술 선생님 소리 들으며 살고 싶었다. 나는 내 개인기량으로 세상과 맞짱 떠서 스타 강사가 되고 싶은 야심가가 아니라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가 두려워서 스무살 때 얻은 연세대생 타이틀 뒤에 숨으려 했던 겁쟁이였던 거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나랑 같은 대학 나온 원장들한테, 한참 못한 대학 나온 간호조무사들한테 굽신대야 하는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 나보다 공부못했을 팀장님한테 실적으로 쪼이는 것도, 다른 영업사원보다 인센티브를 적게 받는 것도 억울하지 않다. 학벌이란 사람을 판단하는 수 없이 많은 기준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그들보다 뛰어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영수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학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걸 얻기 위해 남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걸 내려놓으면 훨씬 더 다채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행복해질 것이다. 따뜻한 마음과 겸손함을 가진 사람이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