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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May 21. 2024

나는 솔로 나가면 사람들이 알아보나요?

소개팅에서 연애 프로그램 출연자를 만난다면?

지난주에 나간 소셜 미팅에서 있었던 일이다. 열두 명의 여자와 두 시간에 걸쳐 10분 씩 대화를 하는데 그 중에 한 여자가 나한테 묻는다.

"혹시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예전 같으면 설레었을 것이다. '어? 이거 그린 라이트인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설레지 않는다. 능숙하게 대처한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여자는 슬슬 애가 탄다. 누구지? 회사 사람인가? 프로필 보니까 같은 회사는 아닌데? 토익 학원에 있던 남자인가? 아니면 동호회? 설마... 지난 주 소셜 미팅에 나왔을 때 만났던 남자인가? 한 번 만났던 남자는 걸러달라고 운영진에 얘기했는데 실수로 빠뜨린 건가?

"아, 뭔데요? 어디서 본 거에요?"

애가 타는지 계속 채근한다. 알 만하다. 내가 만약 사무실 구석탱이에 말 없이 앉아있던 이웃 부서 동료였다면, 월요일날 회사에 가서 소셜 미팅에서 당신을 만난 걸 떠벌이고 다닌다면 당신 입장이 난처해지겠지. 조금 더 약올려주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 시간이 10분 밖에 없는데, 금방 자리 옮겨야 하는데 계속 이 얘기를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한다.

"저 사실은 나는 솔로 출연자에요."

여자는 그제야 안심한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제야 이해한다.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나는 솔로 출연자는 대략 이런 느낌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외모와 말투인데 도무지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사람. 최근 출연자이거나 좀 더 임팩트가 강했던 출연자라면 좀 더 정확히 기억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딱 이 정도, 어디서 본 듯 만 듯 희미한 기억으로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전 출연자의 입장에서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그래도 방송에 나가길 잘했네, 그렇게 무존재감은 아니었던 건가 하며 우쭐해진다. 방송에 나가서 딱히 욕 먹을 짓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굳이 부끄러워하거나 숨길 이유도 없다.


나는 솔로 출연은 좋은 스몰 토크 주제이기도 하다. 방송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흥미로워하며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단답만 하던 그녀가 먼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와!! 대박! 저 연예인 만난 거에요? 직접 지원해서 나가신 거에요? 진짜 각본이 없어요? 그러면 707베이비 영철도 컨셉이 아니에요? 진짜 그래요? 뭐 이런 질문들.




하지만 이건 소개팅에서 좋은 징후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방송에 대한 질문, 내지는 다른 출연자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십중팔구, 나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매력있는 남자가 아니라 방송에 나갔던 사람으로 남게될 것이다. 아마 내가 11기 영철이었다면 그딴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겠지.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가끔 특이 취향인 여자들이 있다. 방송에 나갔던 저 가녀리고 어리숙한 남자를 한 번 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여자들도 가끔 있다. 나쁜 남자가 줄 수 있는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아니라 자기만 바라봐줄 수 있는 착하고 지고지순한 남자를 원하는 여자들이다. 그런 여자들에게라면 내가 나는 솔로의 4기 정수라는 걸 밝히는 게 플러스가 될 수 있다. 그 남자가 생각보다 키가 크고 언변이 능숙하며 생각보다 남자답다는 건 보너스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방송 출연은 일종의 프레임이 되는 것 같다. 나에게는 여러 가지 면모가 있다. 리더십있고 당당할 때도 있지만 여리고 섬세할 때도 있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그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을 단순화시킨다. 그렇게해서 캐릭터성을 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을 본 사람들은 그 캐릭터로 나를 기억하게 된다. 그 캐릭터와 일치하는 모습은 부각시키고, 충돌하는 모습은 자체 편집한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면 관계가 더 수월하게 진전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 어려워진다. 결국엔 될 놈 될이고 안될 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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