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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May 30. 2024

글 영업을 시작했다.

어제부터 내가 쓴 글 중에 하나를 프린트해서 만나는 원장님들께 하나씩 드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만날 때마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씩 만들어오겠다며 구독 서비스도 제안드렸다. 기대되는 장점은 대략 이렇다.




1. 기억에 남는다.


대한민국 제약 회사에서 파는 약의 95% 이상은 카피약이다. 최초로 나온 오리지날 약의 성분을 카피해서 만든 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분이나 효과의 차이가 없다. 물론 경쟁품은 알약 직경이 11mm이지만 우리는 8mm이기 때문에 삼키기에 더 쉽다, 경쟁품은 소아용 시럽에 바나나향이 들어갔지만 우리는 딸기향을 넣었다, 하는 식으로 차별화를 할 수는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결국 사람으로 파는 거다. 기억에 남는 직원의 약을 써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장님에게 우리는 인간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ㅇㅇ제약의 걸어다니는 광고판이 아니라 자기만의 개성과 스토리를 가진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건 어렵다. 원장님은 빨리 환자를 봐야 한다. 그래야 돈을 번다. 우리를 위해 할애해줄 시간이 많지 않다. 1분도 길다. 그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방법은 사실상 없다. 어느 학교를 나왔고, 대학 때 동아리는 뭐했고, 취미는 뭐고 하는 얘기를 할라치면 원장님은 쓸 데 없는 얘기하지 말고 가라는 눈빛을 보낼 것이다. 그 눈빛을 읽지 못한다면 이 병원에 다시는 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글은 유용하다. 이 자리에 내가 없어도, 나 대신 이야기를 해준다. 꼭 지금 안 읽어도 된다. 진료하느라 바쁘면 점심 먹고 쉬는 시간이나 환자가 없어서 한산한 시간에 잠깐 보면 된다. 물론 안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다음번에 다른 거 써와서 또 주면 된다. 언젠가는 읽을 거다. 안 읽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들 그걸 나한테 굳이 말하지는 않을테니 크게 상처받을 일은 없어 보인다.


다음번에 내가 찾아갔을 때 원장이 내가 썼던 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걸 촉매로 대화가 이어지게 된다면 청신호일 것이다. 하루에도 열 명 넘게 병원에 찾아오는 흔해빠진 양복쟁이들 중 하나가 아니라 나만의 표정과 이야기를 가진 인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뜻일테니 말이다.


2. 돈이 안 든다.


병원에 갈 때는 보통 커피나 조각케익, 도넛 같은 걸 사간다. 빈 손으로 가면 뻘쭘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친분이 형성되어있는 원장님에게라면 빈 손으로 가도 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어색하고 뻘쭘하다. 그럴 때 먹을 걸 사들고 가면 분위기가 좀 유해진다. 아무리 까칠하고 근엄한 원장님이라도 선물을 주면 적어도 그 한 순간 만큼은 웃으며 고맙다고 해준다. 영업할 때 커피나 도넛의 역할은 수영할 때 수영장 벽을 발로 차면서 부스터를 걸어주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게 다 돈이다. 5000원짜리 스타벅스 커피나 9000원짜리 던킨 글레이즈6개 포장. 별로 비싼 건 아니다. 하지만 쌓이면 돈이다. 하루에 다섯 명 원장을 만난다치면 3~4만원은 우습게 나간다. 그렇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주면 100만원 뚝딱이다. 물론 매출이 잘 나올 때는 100만원쯤 쓰는 건 일도 아니다. 100만원 쓰는 대신 1000만원 팔아오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치면 된다. 하지만 매출이 안나오는 영업사원이라면 100만원을 쓰겠다는 말이 입밖으로 쉬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글은 한 장에 100원이다. 모닝글로리에 가면 100원에 뽑아준다. 도서관에 가면 50원에도 뽑을 수 있다. 비닐 파일에 끼워서 준다고 해도 쿠팡에서 100장에 1만원이 채 안 된다. 하지만 그 효과는 100원이 아니다. 뭔가를 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5,000원 짜리 커피나 9,000원 짜리 도넛 같은 것보다 훨씬 독특한 무언가를 준 느낌이 든다. 아마 원장님도 글써서 온 영업사원을 보는 건 처음일 거다.


3. 나중에 책을 팔 수 있다.


나는 출간 작가다. 2년 전에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출간했다. 하지만 망했다. 천 권 찍어서 백 권 남짓 팔았다. 나머지 900권은 출판사 창고에서 곰팡이를 먹고 있다.


이번에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안면에 철판깔고 팔러 다닐 거다. 당근에서 영화표를 장당 9,000원 씩 대량구매해서 책 사면 이거 하나씩 준다고 할 거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오늘 내가 살 테니까 한 권씩만 사달라고 할 거다. 엄마, 아빠, 형 주민등록번호로 예스24에 가입해서 다 살 거다. 물론 리뷰도 다 올리고.


하지만 나의 고객인 원장들에게 그렇게 하긴 어려울 것이다. 친한 원장이 아니라면 사달라는 얘기를 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책을 냈다는 이야기 정도는 꺼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오~ 그래요? 대단하시네.' 정도로 끝날 거다. 그래서 샘플이 필요하다. '저 영업사원이 글을 좀 쓰는구나. 저 녀석이 썼다면 그래도 한 번 읽어볼만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야 한다. 내 글들은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들도 있다. 이런 것들이다.


1. 위험하다.


나는 모호한 표현을 싫어한다. 내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쓴다. 때로는 그 적합한 단어가 욕이나 성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다.


그걸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평상시에는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내 글을 구독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그런 표현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일테니 쓰고 싶은 대로 써도 된다.


그런데 이건 구독자들이 찾아와서 읽는 글이 아니다. 내가 원장에게 찾아가서 건네주는 글이다. 그들의 의사와 상관 없이, 받아서 바로 쓰레기통에 넣더라도 일단 받기는 해야 하는 글이다.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 한다. 내가 음식을 차려놨는데 누가 와서 먹은 거라면 맛이 없어도 내 책임이 아니지만, 내가 먹어보라고 준 거면 꼭 맛있어야 한다.


2. 귀찮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올라온 글들을 그대로 출력해서 주면 안 된다. 과격한 표현들은 순화해야 한다. 그런데 순화하려니 본연의 맛이 살지 않는다. 날 것 그대로의 내 글에 맞는 원장들이라면 좀 밍밍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서 줄타기를 잘 해야 한다. 본연의 맛은 살리되 불쾌감을 주지 않을 수 있는 최적의 비율을 찾아야 한다.


분량 조절도 해야 한다. 내가 쓴 글들은 보통 2,000자 정도다. A4 10포인트로 1페이지가 조금 넘는다. 그러면 안 된다. 1페이지에서 두 줄 넘어가는 거랑 1페이지는 천지차이다. 뒷장으로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면 벌써 부담이 된다. 그러니 한 페이지에 들어가야 한다. 불필요한 문장이나 수식어구는 빼고 핵심만 남겨야 한다. 그게 다 일이다.




2017년부터 회사를 다녔다. 영업도 하고 마케팅도 하고 영업기획도 했지만 항상 나는 세일즈라는 영역 안에 있었다. 세일즈를 도와주는 사람이기도 했고, 세일즈 전략을 짜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직접 세일즈를 한다.


하지만 이건 처음 해본다. 그래서 기대도 되고 불안하기도 하다. 사상이 불순한 놈이라며 다음부터 오지 말라고 하면 어떡하지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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