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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May 28. 2024

고객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거래처에 들어갔다. 프런트에 앉아 있는 간호사들에게 원장님 만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제일 높아보이는 간호사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며 내 명함을 들고 원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들어오라고 한다.


원장은 모니터를 보고 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원장님? ㅇㅇ제약 김현민입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눈은 여전히 모니터를 향한 채 "네, 안녕하세요~"라고 답한다. 만나자마자 제품 이야기부터 꺼내는 건 너무 삭막해보이니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라는 형식적인 안부인사를 건네고, 원장은 "네."하고 답한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보려고 "저는 어제 도봉산에 다녀왔습니다. 날씨가 엄청 좋더라구요."라고 말을 하고, 원장님은 "그랬군요."라고 답한다. 가라는 거다. 더 대화하기 싫다는 거다. 쓸 데 없는 소리 더 하면 화내겠다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제품 얘기로 넘어간다. 이제 모니터를 향해 있던 고개가 나에게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다고 별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제품은 다 제네릭(카피약, 다른 회사 제품을 복제하여 만든 제품.)이다. 다른 회사 제품보다 효과가 좋은 것도, 양이 많은 것도, 가격이 싼 것도, 디자인이 예쁘거나 사용이 편리한 것도 아니다. 원장도 그걸 안다. 이 제품은 이게 좋고, 저게 좋고, 하면서 열심히 떠들어대지만 원장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 그렇군요."라고 대답을 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빨리 할 말 하고 가라는 거다.




그러고 나온다. 허탈함이 몰려온다. 오늘도 공쳤다. 실적을 올리지도 못했고, 실적을 올리기 위한 실마리를 얻지도 못했다. 하나 마나한 대화만 하고 나왔다. 앞으로도 똑같을 거다. 내가 몇 번을 찾아와도, 무슨 말을 해도 원장은 '얼른 할 말 하고 가세요.'하는 표정으로 하나 마나한 형식적인 대답만 할 거다. 커피를 사다 드려도, 간식을 사다 드려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제약 회사가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 같은 놈들 하루에 열 명씩은 볼 테니까, 그 따위 선물 하루에도 몇 번씩 받을 테니까.


그럼 어떡하지? 골프 좋아하는 원장님들이 많다던데, 골프를 배워봐야 하나? 요즘 의대 증원이 핫한 이슈니까 그 얘기를 해야 하나? 나는 솔로 나가본 적 있다고 하면 혹시라도 좀 재미있어 하지 않을까? 아니면 역시 돈이 최고인가? 돈다발이라도 들고 가야 하나?


'나는 나의 고객을 사랑하는가?'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오늘 이 병원이 망한다면 나는 슬퍼할 것인가? 퇴근길에 원장님이 타고 가던 차가 전복되어서 죽는다면, 나는 조의금을 보낼 것인가? 나는 진심으로 이 원장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고객을 위하는가?


솔직히 말하면 아니다. 당장 이 병원이 망한다고 해도, 원장이 죽는다고 해도 나는 안 슬퍼할 거다. 아니, 슬퍼할 수는 있겠다. 병원이 망하면 이 병원에서 나오던 매출이 안 나오게 될 테니까. 딱 그만큼은 슬퍼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 고객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여기에 왜 왔나? 왜 원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허리를 굽히고, 커피나 간식을 사다주는가? 돈 벌려고다. 이 원장이 우리 회사 제품을 써줘야 내 실적이 올라가고, 내가 성과급을 받고, 진급을 하고, 팀장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고객이 나를 사랑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나를 벗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놈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런 놈을 하루에 열 명 만났는데, 열한 명째 만나고 싶겠는가? 이쯤되면 문전박대하지 않고 만나주기라도 한 게 성인군자다. 내 앞에서 억지로나마 고개를 끄덕여준 게 감사할 일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고객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원장이 나를 자기 벗겨먹으러 온 놈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본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그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영업 사원이다. 약 장수다. 당신에게 약을 팔아야 내가 실적을 내고, 승진을 하고, 장가도 가고, 집도 산다. 결국 돈이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진심으로 당신을 따르는 척 위하는 척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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