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비 Jun 06. 2024

나는솔로 20기, 영호는 뽀뽀 안하고 싶을 수도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맞짱을 뜬 적이 있다. 반에 어떤 녀석이 내 뒤에서 손가락 욕을 날려서였다. 생각해보면 일도 아니었다. 그냥 못본 지나가면 일이었다. 그런데 그땐 그 별 것도 아닌 일을 참는 게 어려웠다. 그걸 참으면 내가 녀석에게 쫄아서 꼬리를 내린 거라고 아이들이 수군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한 번 저 새끼 깐다."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녀석의 귀에 들어가버렸다. 그렇게 맞짱을 뜨게 되었다.


무서웠다. 저 새끼 깐다고 말했을 때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야인시대의 김두한처럼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고 3단 뒤돌려차기를 날려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진짜로 맞짱을 뜨러 학교 뒤 아파트 놀이터로 향하려니 손발이 후들거렸다. 놀이터에 경비 아저씨가 계셨으면, 동네 주민이 신고를 해줬으면, 담배 사러 가던 학생 주임 선생님을 마주쳤으면, 했다.





지금 영호(90년생 현대 엔지니어링)가 비슷한 상황일 것 같다. 첫 데이트 파트너는 순자(94년생 초등교사)였다. 그런데 정숙(87년생 LG전자)이 등장했다. 정숙은 남자의 성적 본능을 자극하는 현란한 플러팅으로 영호의 혼을 빼놓았고 영호는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이제 순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다음주, 드디어 대망의 뽀뽀를 한다.


그런데 영호는 이 상황이 마냥 좋기만 할까?

처음엔 좋았을 거다. 첫 파트너였던 순자는 참하고 진중한 타입의 여성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상대방 남자의 다양한 면모를 검증하려 하는 타입이다. 얼마나 가정적인지, 바람끼는 없는지, 자산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어디에 살고 어디서 출퇴근을 해야 할지 등등. 이런 유형의 여자를 공략하려면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연락도 자주 해줘야 하고, 선물 공세도 해야 하고, 술자리나 여사친들과의 약속도 줄여야 한다. 이런 정성을 들였을 때 비로소 마음을 여는 타입이다.


그런데 정숙은 그렇지 않다. 뒤 안 보고 달려드는 타입이다. 먼저 만나자 하고, 먼저 술 마시자 하고, 먼저 스킨십을 시도한다. 그러니 영호는 할 게 없다. 편하다. 


심지어 그 여자가 꽤나 괜찮다. 대부분의 남녀 관계에서 여자는 검증하는 쪽이고 남자는 검증받는 쪽이다. 유머러스한 화법으로 대화를 주도해야 하는 것도, 밥 값을 내야 하는 것도, 집에 가서 연락해야 하는 것도 남자다. 그렇게 자신의 센스와 재력, 상대방에 대한 진심을 검증받아야 한다. 그런데 가끔 반대로 흘러갈 때가 있다. 나한테 먼저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고, 플러팅을 하는 여자들도 있다. 십중팔구, 그런 여자들은 구리다. 나 같은 핫바지 남자도 가지고 놀 깜냥이 안되니까 나 따위에게 절절 매는 것이다. 그런데 정숙은 다르다. 예쁘고 섹시하고 엉덩이도 38인치다. 직업도 좋다. 대기업 엘지의 과장급 선임이란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갈수록 선을 넘는다. 간식을 먹여 달라며 입에 손가락을 넣질 않나, 화장실을 같이 가자고 하질 않나, 네 옆에서 자고 싶다며 끈적한 숨결로 목덜미를 간질이지 않나.


물론 영호 입장에서 나쁠 건 없다. 이렇게 나에게 노골적인 호감을 표현하는데 더 망설일 필요가 없다. 당장 오늘부터 사귀자고 해도 되고, 여차하면 침대로 데려가도 된다. 정숙의 말마따나 이거에 안 넘어오면 남자 새끼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건 방송이라는 거다. 수십 대의 카메라와 수십 명의 제작진, 그리고 그 뒤에 수십만 시청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영호의 입장에서는 그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여자 밖에서도 이러나? 나한테 하는 이런 섹슈얼한 플러팅들, 다른 남자들한테도 하나?'
'이 여자를 어떻게 믿지? 이렇게 가벼운 여자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이래놓고 안 사귀면? 나는 사귀지도 않는 여자와 어깨를 감싸고 뽀뽀를 한 게 되는 건데?' 
'이 장면이 넷플릭스에 박제되어 버리면 나 앞으로 혼삿길 막히는 거 아냐?'


하지만 이제 와서 도망칠 수는 없다. 지금까지 해온 말과 행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영호도 정숙의 플러팅을 받아주었고, 데이트 선택도 했고, 미역국도 끓여줬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내가 "언제 한 번 저 새끼 깐다."라고 해놓은 이상 맞짱을 뜨지 않고 도망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그러니까 영호는 '정숙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길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남자가 정숙을 채가던지, 아니면 어떤 여자가 자기 마음을 채가던지, 아니면 그 밖에 어떤 이유로 정숙과의 관계가 틀어지던지. 학교 뒤 공터로 향하면서 내가 속으로 학생주임 선생님을 마주치길 기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영자가 영호를 택했다. 영호에게 슈퍼데이트권을 썼다. 그리고 다음주 예고편에서 영호의 표정은 꽤나 밝아보인다. '오늘 집에 가지마', '나랑 결혼할래?' 하면서 유쾌한 플러팅도 날린다. 그런데 영호는, 정말 영자가 좋은 걸까? 어쩌면 영자가 아니라 이 상황이 좋은 게 아닐까? 생각지도 못했던 제 3자가 정숙과 자기와의 관계에 끼어든 상황. 정숙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합리적인 알리바이가 되어준 상황. 영호에게 영자는 맞짱 뜨러 가는 나를 말려줄 교장 선생님이나 아파트 경비 아저씨 같은 존재가 아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