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워온 것이 내 앞을 가로막을 때
얼마전에 글을 쓰고 출판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에서 워크샵을 다녀왔다.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저녁 회식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다가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찢어져서 숙소에서 술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어떤 사람이 블로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블로그를 열고 자기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썼더니 도무지 조회수도 안 나오고 이웃도 안 늘었는데 네이버 알고리즘에 따라 사진 개수와 키워드, 업로드 시간 등을 최적화해서 맛집 홍보글이나 정보성 글 위주로 썼더니 조회수도 잘나오고 수익화도 잘되고 자기가 원래 쓰고 싶었던 글까지 떡상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듣는 척하다가 슬슬 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흔해빠진 맛집 홍보 블로그라는 거잖아? 겨우 광고수익 몇 푼에 글쟁이로서의 자존심을 팔아먹은 사람이 글을 쓰겠다고? 그런 사람이 만드는 책 쯤이야 알 만하네. 자기만의 독특한 시선도, 내면에 대한 치열한 탐구도 없는 식상해 빠진 글이나 쓰겠군. 그런 주제에 8년차 글쟁이이자 한국의 알랭 드 보통인 내 앞에서 글을 논해? 분수를 알아야지.'
말은 점점 길어지고, 속으로 욕하는 것도 지겨워서 졸리다며 핑계를 대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는데 문득 현타가 왔다. 나는 7년차 회사원이다. 한 때는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현실의 벽을 깨닫고 다시 평범한 사회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하기 싫은 것들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었던 건 그딴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고 있는 아들을 먹여살려준, 날 대신해서 하기 싫은 일을 했던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늦은 나이에 시작한 취업준비에도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어린 시절에 하기 싫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명문대 졸업장을 따놓았기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다. 제약회사 마케터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살아남아야 언젠가 글써서 밥벌이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위해 계속 도전할 수 있으니까 회사를 열심히 다니고 있다.
그런데 유독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에 했던 설익은 생각들이 다시 튀어나온다. 나는 저 블로거가 쓴 맛집 홍보글이 수준낮고 식상해빠진 글이라고 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저 글에는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자기만의 시선이 담겨있지 않다는 거? 그게 수준 높은 글을 따지는 기준이라고 정한 건 누구인가? 물론 나다. 나는 왜 그런 글이 수준 높은 글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그런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맛집 리뷰를 쓰는 사람이었다면, 예쁜 사진과 이모티콘이 들어간 글이 수준 높은 글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수준 높은 글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무엇도 완벽히 옳지 않고 완벽히 그르지도 않다. 그렇다면 다수결로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글이 곧 좋은 글이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나? A4 한 장이 넘어가는 장문의 글들을 9년 동안 썼는데, 그걸 책으로 엮으면 열댓 권은 족히 나올텐데 그 많은 노력을 들여서 내가 이룬 게 뭔가? 블로그 구독자는 몇 명이고, 조회수는 몇이고, 애드 포스트 수익은 얼마나 나오나? 만약 내 글이 여러 사람의 선택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었으면 어련히 네이버 알고리즘이 내 글을 메인 페이지에 띄워주지 않았을까? 네이버는 매력적인 정보를 전면에 내세워야,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야 돈을 버니 말이다.
심지어 저 사람이 평생 동안 맛집 홍보글만 쓰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자기도 쓰고 싶은 글이 있는데 그걸로는 영 조회수가 안 나와서 일단 맛집 홍보글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그렇게 유입된 사람들에게 진짜 자기 글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지난 6년 동안의 사회생활을 통해 배운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내가 언젠가 글쟁이로 성공하기 위해 지금 하기 싫은 회사일을 하듯 저 사람은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널리 알리기 위해 쓰기 싫은 맛집 홍보글을 쓰는 것 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것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자기 쓰고 싶은 글만 쓰면서 언젠가 세상이 알아주길 기다리고 있는 나보다 오히려 저 사람이 더 진정성있는 꿈을 가진 게 아닌가?
자존심.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는 내가 최고라고, 누구도 감히 내 글을 평가할 수 없다고 믿는 마음. 그건 분명 내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9년 째 읽는 사람도 별로 없는 글을 꾸역꾸역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존심이 때로는 성장을 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누군가 내 글에 대해 부정적인 평을 할 때, 혹은 나보다 더 인정받을 때 저 사람의 비평으로부터, 저 사람의 글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냥 무시해버린다. 남들 다 하는 흔해 빠진 소리 늘어놓은 글이나 쓰는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훈장질이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