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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비 Jan 21. 2023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무한 경쟁 사회 속의 퐁퐁남들


무성욕자 (brunch.co.kr)

↑↑↑↑ 지난번에 썼던 글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외국인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여성들과 식사를 하다가 모델이라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둘 중 한 사람은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 기업의 러시아 지사에서 일하다가 얼마전 한국으로 왔다. 두 사람 다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때 동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외국인, 그것도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고, 정규직으로 인정받으면서 일하는 게 쉬운 게 아니라며 만류했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신을 믿고 직장을 박차고 나왔고, 지금은 자신들의 결정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두 분 다 잘 되고 계셔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잘 안 되었다면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둔 걸 후회했을 수도 있다.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절대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처음 모델 일을 시작하고 몇 년 동안은 직장에서 받던 돈의 4분의 1 정도 밖에 벌지 못했고, 모델 활동을 한지 4년이 넘어서 인플루언서가 되고 일거리가 꽤 많이 들어오는 지금도 직장에서 받던 수익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당장 돈벌이가 되지 않더라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너무 좋고, 열심히 하다보면 분명 더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과거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 거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친구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화를 했다. 친구는 최근에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었다. 기업이라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부속품이 되어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서 그만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후회한다고 했다. 만약 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실패해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게 된다면 예전만큼 좋은 직장을 다시 구할 수 있을지,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자기는 회사를 왜 그만둔 건지, 애초에 그만두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닌지, 하는 것이었다.


그날의 대화를 곱씹다보니 러시아와 한국의 연애 문화와 직업에 대한 태도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남자로부터 강렬한 성적 끌림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남자의 구애를 받아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한테 잘해주니까, 혹은 조건이 좋으니까, 지금 당장 만날 남자가 없으니까 만난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이러한 경향은 더 심해진다. 여자가 남자를 평가할 때 성적 매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고 집안이나 직업, 경제적 안정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다. 이 비중이 100%에 근접하면 소위 말하는 퐁퐁남이 된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이런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한다. 성적 끌림이 없는 남자와는 절대로 연애를 시작하지 않는다고 한다. 철없는 십대 소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 적령기가 되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집이나 차도 없이, 단칸방에서 월세를 내며 신혼 생활을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남자들은 이러한 한국 여자들의 성향을 혐오한다. 한국 여자들은 다들 남편 잘 만나서 팔자 고쳐보려고 하는 속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나이도 젊고 쭉쭉빵빵한데다 순수하기까지한 외국인 여자와 국제결혼을 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연애 문화의 차이는 단순히 개인의 성향 차이라기보다 직업에 대한 관념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은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도전을 해야 한다.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게 금기시된다. 직장을 그만두고 오디션을 본다거나, 유튜버가 되겠다거나 하면 네 나이가 몇인데 그런 철없는 소릴 하냐고, 네가 뭐나 되는 줄 아냐고 한다. 그런 건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고, 너 같은 평범한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고 한다. 남자도 이 정도니 여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9급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는 게 여자에게 최고의 성취로 꼽힌다. 그러니 도전을 할 수가 없다. 그냥 살던 대로 살게 된다. 올해 연봉이 4천만원이면 내년에는 4천2백만원이 되고, 내후년에는 4천4백만원이 되고, 10년 후에는 6천만원이 된다. 내년과 후년, 10년 후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1차 방정식의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한 방 역전을 노린다. 남자들에게 그 수단이 주식이나 코인이라면 여자들에겐 결혼이다. 내 인생에는 이미 변수가 없기 때문에,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역전을 하려면 이미 나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모든 게 완성된 남자에게 숟가락을 얹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도전 정신이 없는 쫄보들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개인은 환경의 산물이다. 아무리 독립적이고 개성이 넘치는 사람이라도 그가 속한 사회의 분위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한국인들이 도전을 꺼리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모든 게 상향평준화 되어있는 사회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대학에 가고,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최저 시급으로도 월세를 내고 자동차를 굴릴 수 있는 사회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돋보이기 어렵다. 앞서 나가려면 하나에서 열까지 무엇 하나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실패를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도전도 안 된다. 한 학기 동안 휴학을 한 것 만으로도, 직장을 그만두고 두어달 정도 세계 여행을 가거나,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보거나, 그냥 멍 때리고 쉰 것만으로도 인사 담당자에게 '공백 기간에 뭐하셨어요?', '그냥 시간 낭비하셨네요?'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니 한국인들은 안정적인 삶, 다시 말해 뻔한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남자들은 코인이나 주식에, 여자들은 결혼에 목숨을 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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