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나의 그립고 무거웠던 대학생활에게
지하문학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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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어느새 26살이 되었습니다. 대학생 7년 차. 20대를 2년은 군대에, 4년은 대학에 그리고 1년은 방황하며 보냈습니다. 아니 어쩌면 7년간의 방황일지도요. 이제 4년 남아버린 20대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이건 청춘의 기록일지, 방황의 기록일지, 외로움의 기록일지, 아니면 젊음의 기록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지금 이 글을 안 쓰면 미래의 나에게 미안할 것 같아 조용히 끄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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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어.”
형무는 술을 먹다가 말버릇처럼 디스토피아를 기원했다.
“또 그 소리. 근데 멸망했으면 좋긴 하겠다.”
소민은 기운 없는 형무를 보며 나지막이 동조했다. 왜일까. 1학년 때는, 아니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기운이 넘쳤는데 대학교 4학년 막학기가 되니 모든 일에 기운이 없고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기분은 어디서 오는 걸까. 불안일까 공허일까.
대학이 한 학기 남았지만 진로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같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내 친구들도 똑같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걸까. 남들이 밤새 자격증 공부할 때 서늘한 자취방에 앉아 종이컵에 페트병 소주를 따라 마셔서 그러는 걸까. 어찌 됐던 취기에 불안이 씻겨져 내려가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치현이 보고 싶다.”
“또 그 소리.”
소민은 오늘도 전 남친 이야기를 꺼냈다. 무한반복되는 똥차였지만 보고 싶다는 말.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민은 전 남친과 헤어진 지 2년이 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중. 형무는 1학년 때부터 계속 멸망을 논해왔고 나언은 늘 새로운 동아리 얘기만 했다.
“어떻게 할 거야 우리.”
“뭐를?”
“그거 말이야 자취생 연합회.”
“그거 아무도 안 들어오는데 뭘 어떻게 해?”
“아 나 진짜 녹진한 동아리 제대로 해보고 싶단 말이야.”
“아니 재밌는 데를 찾을 거면 사람 많은데 들어가. 댄동이나 음동이나.”
“아니 몰라서 물어? 다 들어갔다 와봤는데 그 뭔가가 없어 뭔가가.”
“그 뭔가가 뭔데요ㅋㅋㅋㅋ.”
“그 뭔가 녹진하고 찐한 느낌이 없어.”
“아니 그래서 그게 뭔데ㅋㅋㅋㅋㅋㅋ.”
“알면 제가 벌써 말했겠죠? 나도 모르니까 그런 거 아녀!”
“에휴 맨날 녹진한 동아리 얘기 질리지도 않냐.”
소민이 천천히 술잔을 들며 풀린 눈으로 말하자 나언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아무튼 나는 우리 자취생 연합회 제대로 해보고 싶어.”
“좋지. 근데 포스터 붙이고 에타에 글 올려도 아무도 안 들어오잖아.”
“허허 참. 사람들이 이렇게 좋은 동아리도 모르고 말이야.”
“여긴 그냥 우리끼리만 재밌는 동아리야. 다른 사람들은 관심 없어.”
“서운하다 서운해. 다들 몰라주고.”
나언은 씁쓸한 표정으로 소주를 마셨다. 우리는 자취생 연합회이다. 회원은 단 4명. 회원은 상시모집 중. 단지 다들 안 들어와서 4명일 뿐. 포스터도 붙이고 홍보 글도 올려봤지만 다들 감감무소식. 이게 나이의 문제인지 고학번들만 있는 동아리라 안 들어오는 것 같다. 어째 우리의 미래처럼 동아리의 미래도 불투명한지.
“구안. 너는 영상 계속할 거야?”
“해야지 이게 좋으니까.”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내 말이.”
“참 너도 안 바뀐다. 1학년 때부터 혼자 영상 만들고 우리한테 보여주고.”
나는 소민의 말을 들으며 뒤로 벌렁 누웠다. 나는 그대로인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여태까지 뭘 한건 많은데 막상 보니 왜 이렇게 해놓은 게 없는지. 세상을 살아가려면 무슨 자격이 그렇게 많이 필요할까. 지금이라도 영상을 때려치우고 다른 자격증 공부를 해야 하나 생각했다. 불안에 휩싸이면 내가 영상을 좋아하는지도 헷갈린다. 이걸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다른 걸 알아봐야 하나. 불안은 계속해서 내 마음을 좀먹었다.
“곧 졸업이네. 막학기 실감이 안 난다.”
“그러니까.”
내 말에 형무가 인스타를 하다가 대답했다.
“대학생활 진짜 재밌었는데.”
“뭐야 왜 과거형이야.”
“그냥 이제는 보내줘야 할 것 같아서.”
“아 다 같이 왁자지껄 놀 때 진짜 재밌었는데.”
“근데 이제 4명 남았네.”
“학교 축제 또 갈 수 있을까.”
“졸업하고 가면 그 느낌이 안 날걸.”
“아무래도 그렇겠지?”
대학생활은 설탕으로 만든 얇은 판 같다. 흰 설탕을 녹인 후 판으로 굳히면 달콤한 유리가 된다. 그래서 설탕 판은 달콤하고 매력적이지만 들고 있으면 언제 부서질지 몰라 매번 두렵고 불안하다. 1학년 때는 설탕판의 달콤함에 더 눈이 갔는데 4년째 설탕판을 들고 있으니 그 연약함에 더욱 눈이 간다. 나는 과연 이 설탕판을 깨트리지 않고 사회로 나갈 수 있을까.
“취업할 수 있을까.”
“글쎄.”
“하이 빅스비. 오늘 한강 수온 좀 알려줘.”
“ㅋㅋㅋㅋㅋㅋ미친놈.”
불안한 네 사람이 마시는 술에도 감미료는 들어있다. 쓰지만 단맛은 존재한다. 이렇게 불안한 지금도 나중에 보면 젊음이 빛나는 나날이겠지. 아니려나. 잘 모르겠다. 취기가 차오르자 다들 차가운 방바닥에서 일어나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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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
“당신은 공허하십니까? 아니 당신도 공허하십니까?”
“뒤지게 공허해요. 오늘 하루종일 굶었거든요.”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알아 임마. 유튜브에 올린 영상 잘 봤다. 하여튼 센치하기로는 탑이야.”
나언이 씩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요즘 공허가 나를 감싸온다. 이 기분은 어디서 온 건지 모르겠다. 불안에서 온 것일까 아니면 결여에서 온 것일까.
“고기를 먹으면 좀 덜 공허하려나.”
“뭐야 너 돈 많아?”
“아 오늘 월급날임. 그지 같은 식당 알바.”
“삼겹살?”
“좋지~ 가자.”
“소민이랑 형무 곧 수업 끝날걸.”
“같이 가자. 우리 자취생 연합회 회원들이랑ㅋㅋㅋ.”
나언이 웃으며 나를 앞서 갔다. 나언의 말처럼 고기를 먹으면 좀 덜 공허해지려나. 공허라는건 무언가를 계속 놓친 기분이다. 살아가면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 하지만 내가 놓친 것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허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이유를 찾는 건 꽤나 어려워서 이유를 찾다 보면 더 깊은 공허에 빠지기 쉽다.
“아 잘 좀 구워봐.”
“그럼 네가 굽던가.”
소민과 형무가 티격태격한다. 불판에 버터를 바르자 순식간에 삼겹살이 올라간다. 형무가 고기를 자꾸 뒤적거리자 소민이 짜증을 냈다.
“아 좀 기다리라고 지금 내가 굽고 있잖아.”
“선생님 어떻게 빨리 좀 안 돼요? 배고파서 미쳐버리겠어.”
고깃집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친구들의 투닥거림 속. 나언은 반쯤 손을 들어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소주가 테이블에 도착하자 소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술 또 먹어?”
“그럼 안 먹어?”
“먹긴 먹어야지.”
“어제는 자취생 연합회 회식이고 오늘은 문화학부 동기 모임이지.”
“4명 남은 동기?”
“그냥 조용히 하고 술 받아.”
나언의 말이 맞았을까 고깃집의 연기와 사람들 목소리 사이에서 내 안에 있던 공허가 사라지는게 느껴졌다. 웃고 떠들다 얼마 없는 돈으로 맛있는 걸 사 먹는 날. 평범한 일상이지만 빛나듯이 소중하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공허는 다시 나를 찾아온다. 공허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숨어있었을 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자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재촉했다.
감은 내 눈을 햇살이 두드린다. 아침이 오자 공허는 오래전 일인 듯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간다. 배가 고파 대충 아무거나 주워 먹고 학교로 향했다. 지루한 수업을 듣고 잠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 그러다가 다시 수업을 들으러 간다. 그리고 다시 친구들을 만나 간단히 저녁을 먹고 과제를 한다. 매일 다르면서도 묘하게 같은 일상. 가끔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은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에 이상함을 느낀다. 과제를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 찰나 친구가 좋은 노래 하나를 틀었다. 그러자 공허가 밀려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가.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그리고 나를 이 공허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뭘까. 그게 무엇이 됐든 나는 나의 빨간 알약을 빨리 찾고 싶었다.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빨간 알약을 먹고 진짜 현실로 나왔듯이 나도 이 공허라는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슬픔과 허무한 감정 때문에 내 옆의 친구들이 NPC처럼 느껴지려 할 때 형무가 나를 툭툭치고 젤리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먹고 네가 튼 노래가 좋다고 말한 뒤 다시 과제를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빨간 알약을 찾던 나는 꿈속으로 되돌아왔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 다시 해가 지자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상한 감정이 다시 밀려오자 얼른 자리에 누워 잠을 재촉했다.
“너 요즘 무슨 생각해?”
소민이 단과대 로비 의자에 기대 과자 먹는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천천히 돌려 말했다.
“그냥 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가 해서.”
“너 영상 하고 싶은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그냥 이걸 진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영상 쪽에서 어느 분야를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야 그래도 너는 좀 낫지.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너 좋아하는 거 있잖아.”
“뭐?”
“술 먹는 거.”
“에이씨. 그런 거 말고 새꺄.”
나는 소민의 짜증에 킥킥거리며 웃었다. 소민이 한숨 쉬며 의자에 털썩 기대자 나는 괜히 창밖을 보며 속에 있는 말을 툭 던졌다.
“그냥 길을 잃은 느낌이랄까.”
“길?”
“응. 세상이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대학 가고 강의도 들었는데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다음은 취업이지.”
“과연 취업을 하면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냥 뭐 굶어 죽지는 않을 듯.”
“다들 그냥 돈인 건가.”
“아무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잠시 말을 쉬어갔다.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된 말들이 부글부글 끓었다.
“취업하면 행복해질까?”
“그건 아닐걸~ 결혼도 해야 하고 애도 낳아야 하고 집도 사야 하고 피곤한 일이 넘쳐나.”
“아무래도 그렇지?”
소민은 의자에 반쯤 녹아있다가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내게 말을 던졌다.
“그냥 일단 뭐라도 해보자. 뭐라도 되겠지.”
“그래서 너는 공무원 준비하게?”
“뭐 어쩌겠냐. 꿈도 없고 해 놓은 것도 없는데.”
“너 노래 잘하잖아.”
“에이 워낙 잘했으면 벌써 데뷔했지. 그냥 공무원이나 해야지.”
“이제 밴드 동아리는 안 해?”
“안 해. 전 남친 있는 데를 왜 가냐.”
“뭔가 아깝네.”
“뭐가?”
“그냥 네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
“됐어. 대학 다니면서 많이 해봤는데 뭐.”
소민은 잠시 숨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수업까지 아직 남았지? 난 이제 수업이라 간다.”
“오케 잘 갔다 오셔. 이따가 봐.”
“엉 이따 정문에서 애들이랑 만나.”
나는 계단을 올라가는 소민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기대 창밖을 바라보며 과자를 먹었다. 누군가가 보낸 알림이 지잉지잉 오지만 무시한 채 계속 창밖을 바라봤다. 공허한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끌려가며 살아가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나는 무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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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
대외활동에 떨어졌다. 영상과 디자인 관련 대외활동이었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이 스펙이 굉장히 필요했는데 떨어지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 영상 능력? 서류 평가? 아니면 면접? 머릿속이 복잡했다. 우울이 차올랐다. 불안은 더욱 커졌다. 형무랑 나는 머리를 감싸며 그대로 자취방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 이걸 떨어지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인재를 모르고 말이야.”
그리고 정적. 두 남자는 3초 쉬었다가 분노와 슬픔이 섞인 마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오 씨발!!”
“아 좆됐다 진짜. 앞으로 어떡하냐 진짜.”
“나 쿠팡 뛰러 간다. 아니다 시리야 오늘 한강 수온 알려줘.”
[죄송합니다.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한강 수온 새꺄. 이 멍청한 새끼.”
“어이 한강 갈 거면 나도 같이 가.”
“아오 진짜. 어떡하지.”
“술 땡긴다.”
“먹자. 이건 세상이 우리를 알코올 중독으로 만드는 거야. 우리는 잘못 없어.”
넋 나간 표정으로 둘이 침대에서 널브러져 있자 나언에게 전화가 왔다.
“야 나와 밥 먹자.”
“뭔 밥이야. 술 먹자.”
“또 술? 뭐야 너네 떨어졌냐.”
전화 사이로 짜증 섞인 말과 웃음소리가 번갈아 지나갔다. 형무와 나는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나언은 그저 웃기만 했다. 한바탕 전화가 끝나고 노을이 들어오는 자취방 속 의욕을 잃은 남자 둘은 그저 눈을 감고 해가 지는 걸 기다렸다.
“일단 마셔.”
나언의 말에도 형무와 나는 그저 술잔만 쳐다봤다.
“아잇 왜 안 마셔. 너네가 먹자며.”
“인생 어카냐.”
“아 진짜 붙었어야 하는데.”
소란스러운 술집 안에 남자 3명이 우울하게 앉아있다. 나언은 술잔을 들고 형무와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그 표정을 보고 마지못해 잔을 들고 짠을 했다.
“소민이는 언제 온대.”
“소민이 오늘 본가 간대.”
“그렇구만.”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다들 과자만 주워 먹었다. 그때 나언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언은 다급히 확인한 뒤 잠시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천천히 핸드폰을 내려놨다.
“뭐야?”
내 질문에 나언은 잠시 술잔을 쳐다보다가 술을 마신다.
“붙었대.”
“인턴?”
“엉.”
“홀리 싯.”
잠시 정적이 흐르다 3명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실컷 웃은 뒤 형무는 나언에게 짠을 했다.
“아 정말 묘하다. 아무튼 축하해.”
“뭐 좀 민망하지만 땡큐.”
나언은 나에게도 짠을 하고 소주를 마셨다. 이제야 우리 테이블은 소란스러운 술집 분위기에 어우러졌다. 얼마나 마셨을까.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에 소주를 연달아 시켰다.
다음날 아침 수업. 간신히 제시간에 수업에 도착했다. 숙취 때문에 머리는 아프고 속이 울렁인다. 같이 수업을 듣는 형무는 의자에 기대 잠을 잤다. 기적적으로 3시간을 버티고 해장국집으로 달려갔다.
“진짜 살 것 같다.”
“사실 우린 해장을 하기 위해 술을 먹는 게 아닐까.”
해장을 마치고 다시 수업. 집중이 되지 않는 수업을 견디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똑같은 일상. 똑같은 패턴. 의미 없이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면 지는 해가 나를 맞이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은 들지만 이 길에서 벗어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잠시 멍 때리며 걷는데 까만 모자를 푹 눌러쓴 형무가 저녁 뭐 먹을 거냐고 물어봤다.
“그러게. 해장 한번 더 할까.”
“ㅋㅋㅋㅋㅋ좋지~”
저녁을 먹고 자취방으로 들어와 지친 몸을 뉘였다. 노래를 틀고 이상한 꽃무늬 벽지로 된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어제 떨어진 대외활동이 다시 생각났다. 다시금 속이 쓰리다. 그리고 가슴이 답답하다. 벌써 개강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졸업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소민이처럼 공무원 준비를 할까. 아니면 뭘 해야 하나. 영상 쪽으로 진로를 잡는 게 맞을까.
그때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왔다. 나는 혹시 대외활동 관련 문자인가 싶어 화들짝 들여다봤다. 대외활동 합격 내용은 아니었지만 좋은 소식이 하나 왔다. 예전에 근로하던 학교 부서에서 영상 관련 일거리가 들어왔다. 돈도 궁하고 어차피 이런 것도 나중에 스펙이 되지 않을까.
“그럼 언제까지 만들어서 드리면 될까요?”
“다음 주까지 줄 수 있어요? 구안 학생 시간 괜찮아요?”
“네 저는 4학년이라 수업 많이 안 들어서 괜찮을 거 같아요.”
“좋아요. 그럼 다 만들면 연락 부탁해요.”
“넵.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다음날 저녁 영상 알바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촬영된 내용을 보니 대부분 교수님 인터뷰와 강의 영상. 이 촬영물들을 편집해서 학교에서 밀고 있는 수업 방식 홍보물을 만드는 게 알바 내용이다. 정말 재미없는 영상. 나는 이런 영상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영상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나는 대외활동에 가서 좀 더 활기차고 신나는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 보는 교수님이 인터뷰 중에 말을 더듬는 부분을 편집하고 있다. 저녁시간이었지만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졌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밥은 계속 굶고 일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점심과 저녁도 거르고 하루종일 학교 오픈 스페이스에 앉아 편집을 했다. 친구들의 밥 먹자는 말도 바쁘다며 거절했다. 다음 주까지 주면 될 영상을 이틀 만에 거의 다 끝냈을쯤 소민이 날 찾아왔다.
“너 많이 바빠?
“아 거의 다 끝났어.”
“너 배 안 고파? 하루종일 굶은 거 아니야?”
“배고프긴 하지.”
“근데 왜 밥 안 먹어?”
“그냥 먹기 싫어서.”
“어디 아파? 오늘 하루종일 편집했는데 무리하지 마.”
“밥은 내일도 안 먹을 거야.”
“왜 그래 도대체.”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소민은 화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해. 너 우리한테 불만 있어?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냥 내 몸을 학대하고 싶었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소민의 눈을 피하자 소민은 한숨을 푹 쉬고는 내 귀를 잡고 화난 말투로 속삭였다.”
“아니 왜 그러는지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이 새꺄.”
소민의 말에 움찔한 나는 소민의 매서운 눈빛을 보고 소곤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내 몸을 학대하고 싶어서 그랬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오늘도 굶고 내일도 굶고 내일모레도 굶어버리려고. 그냥 밥을 계속 굶고 일만 하려고 했어. 편집하다 걍 죽으려고.”
“왜 너 스스로를 학대하고 싶은 건데.”
“그냥 내 인생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다 보니까 너무 우울해서 나를 몰아붙이는 거야.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일만 해서 결과물이 많이 나오면 내 인생이 좀 괜찮아질 거 같아서.”
소민은 내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말없이 잡고 있다가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는 나를 보고 말을 툭 던졌다.
“대외활동 떨어져서 그래?”
소민의 말에 마우스를 움직이던 내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지 마. 나중에 다른 거 하면 되잖아. 밥도 안 먹고 왜 그래.”
소민의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소민의 말이 다 맞지만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밀려욌다. 그러게 왜 밥도 안 먹고 그럴까. 다른 거 붙으면 되는데. 다른 기회도 있는데 왜 이렇게 힘들까. 내가 편집을 멈추고 소민을 바라보자 소민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서 잠시 생각하다가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구안아 괜찮아 떨어져도. 그러니까 이상한 객기 부리지 말고 밥 좀 먹어.”
소민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챙겼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구안. 많이 실망했어? 괜찮을 거야. 형무는 지금 자기만 너무 태평한 사람 됐다고 투덜거린다고. 밥 먹으러 가자. 애들 아직 다 저녁 안 먹었어.”
“뭐야 다들 기다렸어?”
“기다렸다기보단 갑자기 배그 마려워서 한판하고 옴.”
내가 피식 웃자 소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빨리 나오라고 부추겼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형무가 내게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야이 개새꺄 너만 불안해? 너만 실망했어? 너만 떨어졌어? 너 때문에 나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애 됐잖아!”
형무의 호들갑에 나는 푸하하 웃어버렸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던 나언은 그런 우리 둘을 보고 배고픈데 빨리 가자고 소리쳤다. 하늘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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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
4시쯤 되었을까 수업이 끝난 내 앞으로 형무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형무는 나를 보자마자 학교는 답이 없다고 말을 쏟아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형무는 자기가 왜 근로지 팀장한테 커피를 타서 갖다 바쳐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저 허허 웃어버렸다.
“거기야? 본관 밑에 있는 부서?”
“맞아. 제정신 아닌 듯. 저번에는 나한테 퇴근하면서 자기 차 시동 걸어놓으라고 그러더라.”
“허허. 대단하네. 자기가 월급 주는 거도 아니면서 왜 갑질이냐.”
“아무튼 이상해. 요즘 더 심해진 거 같아. 저번에는 자기가 집 가서 먹을 김치를 학생식당에서 나보고 나보고 가져오라고 시키더라.”
“와우.”
“아무튼 이거 말고도 더 많아. 이따가 애들이랑 만나서 썰 더 풀어줌.”
형무는 나랑 술집으로 가면서 한참 근로지 욕을 했다. 나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형무가 근로하는 부서만 그런 걸까 아니면 학교 전체가 그런 걸까.
“야 너도? 나도 그런 일 있었어.”
과자 안주를 집어먹던 소민이 형무의 말을 듣고 격하게 공감하며 술잔을 들었다. 소주 한잔을 훅 넘긴 소민은 아까보다 커진 목소리로 형무에게 말을 했다.
“내가 근로했던데는 나보고 통신사 포인트 좀 달라고 그러더라. 자기가 막 돈으로 갚겠대. 근데 이상해서 안 준다고 뻐팅김.”
“진짜 이상한 사람들 많다. 나는 저번에 근로지 사람들이랑 같이 학생식당 갔는데 자기들이 먹던 음료수를 학생식당 영양사랑 주방 이모들한테 먹으라고 주더라.”
“캔으로 된 거 여러 개?”
“아니. 페트병으로 된 거. 페트병에 담긴 거 반 정도 먹고 남았는데 이거 맛있으니까 먹으라고 주더라ㅋㅋㅋ. 인성파탄자들인 줄.”
나는 형무와 소민의 말을 듣고 혼란스러웠다. 사실 근로장학은 교내 알바라기 보단 ‘진짜’ 사회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는 도구였던 걸까? 말없이 안주를 먹는 나를 사이에 두고 형무와 소민은 아까보다 커진 목소리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 오형무 들어봐. 전에 근로지 사무실에 있는데 뒤에 교직원 자리에 전화가 오더라고. 근데 그 전화가 총학생회에서 행사 진행 때문에 학교 시설 대여하려고 물어본 거였나 봐. 근데 그 전화 끝나자마자 그 교직원이 바로 다른 교직원들한테 야 이 새끼들 뭐 한다는데?라고 하더라ㅋㅋㅋㅋㅋ”
“너 옆에 있는데 그냥?”
“엉. 근데 근로생 나만 있는 거 아니었어. 나 포함 5명 있었을걸.”
“와 개 상남자네 그냥.”
“아무튼 진짜 개빡친다. 사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아닌가 봐. 우린 그냥 돈 내고 을인 존재인가 봐.”
“그러게 현타 엄청 온다. 야 구안. 너는 이런 거 없어? 너 과 회장도 했었잖아.”
형무의 말에 여러 일들이 떠올랐다. 물론 짜증 나는 일이 많았다. 다른 학생들에게 학생 뒷담 까는 교수부터 자기가 할 일 안 했으면서 했다고 거짓말하는 교직원까지. 형무와 소민의 말에 까먹고 있던 일들이 선명해졌다.”
“있지. 개빡치는 순간들. 한 번은 다른 과 회장들이 신입생 명단이 나왔다고 해서 학과 단톡방 만들려고 명단 뽑으러 갔는데 우리 과 담당 교직원이 신입생 명단 안주더라. 막 안 나왔다고 잡아떼더라고. 근데 웃긴 건 옆에 있던 다른 과 담당 교직원이 우리 과 신입생 명단 뽑아서 주더라고. 그냥 뭐 개판이지. 그래서 그때부터 행정팀이랑 일할 거 생기면 절대 전화로 안 물어보고 직접 가서 물어봤어.”
“오.. 상상 이상인데?”
“그리고 뭐.. 교수님이 우리 과 담당 교직원한테 어떤 공지를 올리라고 했는데 계속 안 올라와서 교수님이 학생회한테 확인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화하니까 자기는 올렸다고 그러대? 그런데 우리가 확인했을 때는 공지가 안올라왔었거든.”
“어떻게 된거야 그럼?”
“그냥 뭐 교직원이 안했는데 했다고 구라친거지. 우리가 전화하고 몇분 있다가 올라오더라.”
“에휴 니미럴. 맨날 학생들 부를 때도 애들이 애들이~. 그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우리에 대한 존중이 안느껴져.”
소민은 한숨을 푹 쉬고 짠을 외쳤다. 술집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져 가고 빈 술병은 계속 늘어간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건 전공에 대한 지식도 있지만 사회에 만연하는 불합리성, 억울함, 분노가 더 많았다. 지식은 책으로, 교수의 입으로 전해 들은 거지만 그 외에 것들은 내 몸으로 직접 배우고 느낀 것이니 더 크게 다가오고 더 격렬하게 반응하게 됐다.
사실 과 회장을 하며 가장 두려웠던 것은 책임감이라던가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아니었다. 교육 공간인 학교가 이 정도라면 내가 앞으로 나갈 사회는 과연 학교보다 깨끗할까? 합리적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떡해야 하나. 나는 그런 사회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다. 불합리한 사회를 헤쳐가야 할 미래의 내 모습이 불쌍해졌다.
“그래도 저번에 행정팀에 새로 들어온 교직원은 좋더라. 친절하고 잘 알려주고 좋았어.”
형무의 말에 소민도 끄덕이며 대답한다.
“맞아. 저번에 물어볼 게 있어서 학교 지원센터 가니까 거기 있는 분들은 다 좋더라고. 간식도 챙겨주셨어.”
“그분들은 좋네.”
“그러게 말이야. 내 근로지 교직원들도 그랬으면. 에잇 짠이나 합시다.”
형무의 말에 다 같이 술잔을 들고 부딪힌다. 이래서 학교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거치는 곳일 수도 있다. 사회에는 좋은 사람도 이상한 사람도 있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을 테고 학교를 다니며 미리 배우는 과정이 됐다. 학교에서 이를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알아서 다행인 것 같음에도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여기는 학교이고 우리는 학생인데.
다음 날 잠이 오는 오전 수업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도 이 교수님은 그저 PPT에 있는 내용을 따라 읽으며 강의를 했다. 정말로 한심한 강의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어느 순간 수업 내용보다는 수업을 하는 교수님을 더 집중해서 바라보게 됐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쳐갔다. 나도 교수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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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럴 수가. 자취생 연합회에 신입 부원이 들어왔다. 학교에 붙여놓은 포스터를 보고 3학년 친구 한 명이 들어왔다. 그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언이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술집에서 그 친구를 마주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되네?
“아.. 안녕하세요. 저는 3학년인 박현서라고 합니다. 자취생 연합회 포스터가 붙어있어서 들어오게 되었고요. 저도 자취해서 자취생끼리 노는 모임 있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들어와 봤어요. 네 뭐.. 잘 부탁드립니다.”
현서의 자기소개 후 잠시 정적이 있다가 막학기 학생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박수를 치는 소민과 형무의 표정에서 이게 되네?라는 생각이 느껴졌다. 나언은 박수를 치며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네 반가워요. 그럼 신입부원 환영회 회식을 해보도록 할까요?”
“좋지요~.”
하루 걸러 하루 술을 마시는 일정. 미래의 불안함과 함께 우리가 먹어치운 소주의 양은 점점 늘어갔다. 이 와중에 신입 부원이라니 신기하면서도 신이 났다. 무언가 인정받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몇 잔쯤 마셨을까. 간단한 호구조사가 끝나자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연애 이야기로 넘어갔다.
“현서는 연애해?”
“아니요. 안 한 지 꽤 됐어요. 여기서 연애 중인 분 있어요?”
“아니 없어.”
소민이 과자 안주를 입에 한 움큼 넣으면서 말한다.
“근데 가장 최근까지 한 애는 구안이.”
“아하 언제까지 사귀셨어요?”
“나는 뭐 두 달 됐나. 헤어진 지.”
“얘 차였어. 거의 두 달 만에.”
나는 만난 지 70일 만에 차였다. 나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울음 섞인 미안하단 답만 돌아왔다.
“그냥 미안하대요? 울기만 하고?”
“그렇더라. 뭐 나한테 마음이 없어진 거겠지.”
“진짜 연애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수이를 만나게 된 건 술자리에서였다. 그 술자리에 있던 친구 한 명이 자기 친구도 와도 되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그때부터였나. 술자리에서 몇 번 이야기 나눈 뒤 수이와 연락을 하게 됐다. 마음이 움직였고 설렘도 찾아왔다. 수이도 그랬는지 몇 주 뒤 다시 만들어진 술자리가 끝나자 우린 손을 잡고 산책을 했다.
수이는 밝은 친구였다. 그럼에도 뭔가 한편으로는 속을 알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통 모르겠달까. 아무튼 자기가 관심 있는 디자인 쪽으로는 엄청 열심히 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수이의 손을 잡고 산책해도 수이와 같은 침대에 누워있어도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수이를 만나기 전에는 주민이를 만났었다. 주민이는 우연히 단기 알바를 하게 된 자리에서 만났다. 그렇게 썸을 탔고 자연스럽게 사귀게 됐다. 덥고 습한 한여름에 둘이서 몇만보씩 산책을 했다. 주민이 팔에 송골송골 맺힌 땀도 귀엽고 예뻐 보였다. 그때의 생각은, 아니 지금도 주민이랑 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주민이는 처음으로 내 마음속을 다 보여주었던 아이였다. 어느 때는 어른스럽고 어느 때는 순수한 모습에 나는 계속해서 스며들었다. 그렇게 커플 반지를 맞추고 서로의 자취방을 바쁘게 오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우리 사이에 틈이 생겼다. 근데 그 틈이 어느 때는 메워졌지만 어느 때는 계속해서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커진 그 틈을 메울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헤어졌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주민이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헤어진 이후로 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난 아직 주민이의 말투를 쓰고 주민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같이 산책하던 길을 혼자 걸었다. 그러던 상태에서 수이가 내게 다가왔다. 수이와 두 달 동안 재밌게 보냈다. 같이 요리도 해 먹고 전시도 보러 갔다. 혼자 있을 때 수이 생각도 많이 했다.
하지만 수이와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춰도 주민이는 계속 내 안에 가득했다. 나는 수이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이는 내게 헤어지자고 했다. 갑자기 왜 그러냐는 내 말에 수이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울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한참 동안 수이의 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난 널 만나면서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너도 그걸 느끼고 내게 이렇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걸까. 수이의 대답 없는 울음에 마음이 쑤셔왔다.
“그럼 선배 이제 연락하는 사람 없어요?”
“없지.”
현서의 말에 나는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사귀고 헤어진 거 괜찮아요. 다른 사람 만나면 되죠.”
연애 얘기를 실컷 한 탓일까 현서의 얼굴이 아까보다 많이 빨개지고 발음도 어눌해졌다. 나는 현서의 말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현서의 말처럼 다른 사람 만나면 되는 일이지만 지금은 별로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술잔이 얼마나 오갔을까 시답지 않은 서로의 이상형 공유나 짤막한 연애사 이야기를 끝으로 자취생 연합회 신입부원 환영회가 끝났다.
다음날 집에서 먼지 쌓인 통기타를 닦다가 줄을 한번 조여봤다. 튜닝이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줄을 계속 조이며 튕기다가 그만 끊어져버렸다. 이 통기타가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 생각했다. 줄 하나가 끊어진 통기타. 대충 보면 멀쩡한 기타처럼 보이겠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수리가 필요한 기타. 그리고 줄 하나쯤이야 생각하고 그냥 쓰려다가도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 그게 마치 나의 모습 같았다.
그런 기타를 보며 눈을 감고 혼자 생각했다. 주민아 난 아직도 반지 끼던 손가락이 허전한 걸 느껴. 난 아직도 밖에 나오면 집에 다시 들어가 네 번째 손가락에 우리가 맞춘 반지를 끼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해. 너는 어때. 나와 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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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나는 이따금씩 알 수 없는 기분이 들곤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수업을 들을 때도, 친구들을 만날 때도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 내 몸 안에서 솟구쳐 나왔다.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에 무얼 올리거나 뒤집어쓸 때가 있었다.
“구안. 너 요즘 농구해?”
형무가 밥 먹으러 걸어가며 내게 문득 묻는다.
“아니 요즘 잘 안 해. 할 사람도 없고.”
“실력은 그대로인가?”
“실력은 무슨 다 죽었지. 농구 안 한 지 벌써 6개월 넘었다.”
“에이 그래도 선수출신인데 짬바가 있지.”
“그런가? 모르겠어. 요즘 나이 먹어서 그런지 뛸 때 느낌이 좀 달라.”
형무와 나는 농구 이야기를 하며 브리또 가게로 들어갔다. 나는 중학교 2학년까지 농구선수였다. 소년체전도 나가고 그랬었다. 하지만 농구를 그만두고 당시 평범하다 생각했던 공부의 길로 진로를 틀었다. 운동만 하던 아이가 갑자기 공부를 하려니 쉽지 않았다. 앉아있는 건 고역이고 수업 진도도 따라가기 어려웠다.
근데 공부도 공부였지만 제일 힘들었던 건 꿈을 찾는 일이었다. 농구를 할 때는 프로 농구선수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었다. 프로 농구선수라는 꿈은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이 모두 꾸던 꿈이었고 농구를 한다면 응당 꿈꿔야 할 목표였다. 그런데 그 꿈이 사라졌다. 아니 버렸다.
매일 똑같은 훈련이 반복됐고 주말은 없었다. 그리고 많이 맞았다. 하지만 이런 문제보다 제일 싫었던 건 내가 동료들보다 농구를 못한다는 거였다. 중학교 2학년 늦여름이었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프로 농구선수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만약 된다고 해도 행복할까? 이 질문에 단번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3학년 올라갈 때 농구를 그만뒀다.
농구와 멀어지기 위해 농구부 친구들이 없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하지만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목표와 진로가 사라진 것을 느꼈고 그렇게 불안이 찾아왔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는 내가 되고 싶은, 아니 되어야 할 무언가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농구를 그만둔 이유는 미래가 불안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농구에 열정이 없던 내 모습이 싫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열정 가득한 농구부 사람들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겉돌며 갈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는 이런 갈등을 느끼는 내 모습이, 남들과 다른 내 모습이 스스로 이상하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농구를 그만두고 꿈을 찾아 헤맸던 건 열정을 바칠 무언가를 찾고 위해서였다. 나를 표현하고 성취감을 느낄 그 무언가를. 기꺼이 나를 불태울 무언가를. 그리고 이상한 내 모습이 아닌 멋진 내 모습을 찾고 있었다.
“아우 브리또 언제 나오냐.”
“사람 개 많다 진짜. 주말인데 학교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몰러. 아 너 그 영화 봤냐? 구교환 나오는 메기인가”
“응? 안 봤는데. 왜?”
“아니 교양에서 보라고 그래가지고. 근데 너 예전에 영화감독 하고 싶다고 그랬었잖아. 근데 메기도 안봄?”
“그게 뭔 상관이야ㅋㅋㅋㅋ.”
사실 나는 꿈을 찾은 줄 알았다. 고등학생 때 영화가 무척 좋아졌고 영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한계로 영화과에는 지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의 문화학부에 입학하고 난 후 이런저런 일로 영화에 도전하는 일이 점점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자취방에 돌아와 별생각 없이 문화학부 커리큘럼에 따라가며 착실히 알바를 하고 있는 내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이 살고 있을까. 답답하고 화가 났다. 마음속에 가득 얽혀있는 감정의 실타래를 그저 안 보이게 숨겨두고만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우연히 드라마 스태프 알바를 했을 때 촬영현장이 나와 안 맞는다는 걸 느꼈다. 드라마 스태프 일이 끝나자 묘하게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기분은 불타오르던 알코올램프에 뚜껑을 씌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알코올램프는 닫힌 뚜껑 아래에서도 활활 타고 있었다. 다만 그걸 스스로가 못 느꼈을 뿐 열정을 불태울 무언가를 찾는 것은 계속됐다.
내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머리는 몰랐던 것 같다. 나는 가끔씩 내 삶의 환멸을 느꼈고 삶이 답답하다고 느꼈다. 이렇게 머리와 마음이 안 맞을 때면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난 그 감정을 막기 위해 머리에 무언가를 올리거나 뒤집어썼다.
“또 머리에 뭐 올리네. 최구안씨 몇 살이죠?”
“아앗 26살입니다.”
“왜 지갑을 머리에 올리고 그러냐. 넌 멀쩡한 거 같은데 가끔씩 이상한 짓 하더라.”
이상하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밖으로 나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그 감정이 터져버려 날 망칠 것 같았다. 이 망칠 것 같다는 느낌. 이건 꿈이 아닌 현실의 삶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이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이 답답한 마음이 해결되진 않는다. 닫힌 뚜껑 아래에서 불이 계속 타고 있으면 뚜껑은 어느새 녹아버릴 것이다.
“그 뭐야 영상 팀은 계속할 거지?”
“그럼 해야지. 지금 이게 제일 좋은데.”
“좋아. 이왕 팀 짠 거 계속 같이 해보자. 내가 디자인하고 네가 영상 만들고.”
“좋지요. 열심히 해보자고.”
영화라는 꿈은 포기했다. 이제 영화에는 열정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영상에는 열정이 있다. 재밌고 의미 있는 영상 작업을 해보고 싶다. 얼마 전 고등학교 때 봤던 무지개 여신이라는 영화를 다시 보며 깨달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오이. 고등학생이었던 난 그 모습이 좋아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오이가 아니라 무언가를 좋아하고 열정을 담는 아오이 자체에 매료됐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아오이의 죽음이 나온다. 나는 그걸 보며 너무 힘들었다. 거기서 아오이의 죽음은 아오이의 열정과 사랑에 대한 죽음이기도 했다. 나는 그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영화를 본 며칠 동안 긴 후유증을 가지며 살아갔다. 그만큼 열정은 나에게 정말 소중했던 존재인 것 같다.
이 내용을 깨닫는데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이유를 알게 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형무가 내게 큰 도움을 줬다. 형무가 내 오래된 고민을 상담해 준 건 아니지만 형무와 팀으로 일하면서 내가 가진 오랜 고민들이 실타래 풀리듯 해결됐다. 이제 진짜 꿈이 된 영상에 나를 표현하고 내 열정을 쏟아붓고 싶다.
드디어 나와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 같다.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딱 10년 걸렸는데 너무 늦지 않았기를. 이전에는 가끔씩 긴 꿈을 꾸는 듯 현실이 멍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
“야 감자튀김 더 먹어. 난 배불러.”
“아 진짜? 개꿀.”
난 지갑을 머리에서 내려놓으며 형무에게 감자튀김을 몰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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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와 해진다.”
“하늘이 보라색이여.”
“애들은 언제 온대.”
“6시 넘었으니까 수업 끝나서 곧 올 듯?”
“그렇구만.”
“형무야 근데 좀 이상하지 않냐.”
“뭐가?”
“우리 입학하고 나서 이것저것 하면서 엄청 열심히 살아온 거 같은데 뭔가 이룬 게 없다.”
“그러게 뭘 많이 하긴 했는데 뭔가 허전해.”
살다 보면 어렴풋이 알지만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내게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이 그랬다. 나는 해가 넘어가기 전 1시간 정도 유지되는 보랏빛 하늘의 분위기를 가장 좋아한다. 이 보랏빛 하늘은 내게 있어 오늘의 소중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은 해질녘이 아니라 대낮이었던 것 같다. 살아가다 보니 세상의 유행과 주변의 상황 때문에 나도 모르게 다음날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대낮으로 끌려갔던 것 같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계속 대낮에 머무르게 했다.
그렇게 공허는 계속되고 방황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한 노래를 들었다. Tuesday Beach Club의 Endless Shine. 나른한 해질녘 해변의 분위기를 담은 곡.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아 맞다 이것이 내가 원하던 삶이었지. 이것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삶이었지. 대학에 올라와 세상과 만나고 사회에 부딪히며 원래 바라던 삶을 놓치고 있었다.
“야 나 왔다!”
뭐 먹을지 이야기하고 있던 형무와 내 쪽으로 소민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 뒤로 나언과 현서가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오늘 하늘 예쁘다.”
“그치. 근데 아까가 더 예뻤어. 지금은 좀 어두워졌네.”
내가 보랏빛 하늘을 좋아하는 이유는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한한 것들을 사랑한다. 언젠가 저버릴 꽃들을, 언젠가 내 곁을 떠날 사랑하는 이를, 그리고 언젠가 과거가 되어버릴 나의 청춘을. 나는 나의 청춘이, 더 정확이 말하면 나의 오늘이 보랏빛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른한 해질녂 해변에서 바다를 보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생각을 깨닫게 되자 좀 더 내 청춘을,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담긴 오늘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기록하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하지만 누군가는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고도 했으니 지금이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됐음에 감사했다. 20대가 몇 년 남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이 보랏빛 하늘을 즐길 최적의 시기일지도 모르지. 이제는 20대의 해질녘에 들어왔으니 더욱더 보랏빛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야지.
“야 그래서 뭐 먹을 건데. 치킨 먹자 치킨.”
“치킨 저번에도 먹었잖아. 오늘은 삼겹살 먹자.”
“삼겹살도 좋지~.”
소민이 기분이 좋은지 앞으로 훌쩍 뛰어간다.
“야 좀 뛰지 좀 마! 같이 가야지!”
달려가는 친구들을 보자 전에 나언이 말한 동아리의 녹진하고 찐한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우리가 가진 청춘의 조각이지 않을까. 찬바람이 매섭지만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보랏빛 하늘 아래에서 깔깔거리며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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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고등학생 때 뉴스에 나오는 학교 문제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학교폭력 문제와 입시 문제는 간이 덜된 국처럼 뭔가 밍숭맹숭하고 이상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직접 고등학생인 내가 실제로 겪고 느낀 문제들을 이야기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입시에 시달리는 고3 때 하는 바람에 그때의 고민은 그저 생각만으로 끝났었지요.
그렇게 대학에 올라오고 군대를 다녀오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내가 앞으로 나갈 사회는 지금 이 학교라는 세계보다 더 나은가? 대학을 다니며 학교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깨달았습니다. 학교도 이런데 졸업 후 내가 나아가야 할 사회는 더 나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문득 두려워졌습니다. 내가 나아가야 할 곳이 내가 있는 곳보다 좋지 않은 세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막막하게 느껴졌습니다.
앞에서 본 이야기들은 두려움에서 시작된 것들입니다. 대학생인 제가 졸업하기 전의 감정∙느낌∙현실을 기록하고 싶어서 만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뉴스를 보며 수많은 고민을 했던 고등학생에게 바치는 이야기입니다. 졸업하고 학교를 떠난다면 나의 현실은 나아질 수 있을까요? 부디 나의 슬픔 예감이 송두리째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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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2024.10.22)
이 글을 썼던 26살의 대학생은 28살에 졸업 후 책을 출간하여 작가가 되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진짜 꿈을 이룬 거지요. 어쩌면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글쓰기였나 봅니다. 아오이를 보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어린 나이에 친구가 멋있어 보이면 따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그 감정이 꽤나 강렬하긴 했지만요).
이 글은 제 대학생활을 담은 타임캡슐입니다. 이걸 보는 이도, 가끔씩 펼쳐 볼 미래의 나도 졸업 전 어떻게 살아야 되나 고민하던 26살의 지후를 보듬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한 척 괜찮은 척하지만 늘 외롭고 방황하던 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글을 본 미래의 나는 또 다른 추신으로 새로운 지후의 삶에 대한 내용을 적어줬으면 좋겠네요. 앞으로도 계속 마음속을 두드리며 영혼에 맞는 것들을 찾아가는 당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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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2026.01.12)
새해네요. 26살의 저는 어느새 서른이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첫 장편소설을 썼어요. 물론 출간은 어렵습니다. 출판사에 투고한 원고가 채택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26살의 나, 지금 보고 있나요? 저는 작년에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마찬가지고요. 26살에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예술을 선택할지 아니면 돈과 번듯해 보이는 직업을 선택할지 참 저울질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 결국 저는 지난한 작가의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예술이라는 단어에 온 마음을 던져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재작년의 바람처럼 영혼에 맞는 것을 제대로 찾아낸 것 같거든요. 앞으로는 더욱 어려운 길이겠지요. 투고는 여전히 가망이 없어 보이고 신춘문예는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리라 믿습니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순수한 욕망과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꽃을 위해 묵묵히 글을 쓰려고 합니다. 저는 미래의 당신이 부디 지금의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벼리고 벼려진 글이 궁금해집니다. 부디 아름답고 뜨겁게 갈아주세요. 읽는 이들이 무참히 쓰러지도록.
글: 김지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