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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경어터 Oct 15. 2019

계획대로 되지 않는 곳에 감사가 숨어있다

두 번째 암수술 후 감사고백③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수술을 앞두고 서재에서 입원기간 동안 읽을 책들을 챙겼다. 3천 권이 넘는 책들 중 어떤 책을 챙겨야 할지 고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20대부터 읽어온 책들과 읽어두려고 인터넷 서점으로 사놓은 책들 중 몇 권을 골랐다. 몇 권 안 챙긴 듯했는데 캐리어 절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실컷 책을 챙겼지만 정작 수술이 끝나고는 책을 전혀 읽지 못했다. 수술 통증 때문에 책 읽을 힘이 없었다. 아내는 짐만 되는 책들을 집으로 가져다 놓았다. 통증은 퇴원 이후에도 이어져서 한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 대략 한 달 동안 책을 읽지도 못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허락받았다.


나는 일 중독자였다. 수술을 앞두고도 일할 생각만 가득했다. 이랜드 박성수 CEO나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CEO는 병상 중에도 독서에 매진했다. 병상 중에 책을 읽은 그들의 모습처럼 수술 이후에 독서할 계획이었다. 책 읽기와 함께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전까지 책 한 권을 쓰려고 계획했다. 이런 계획과는 수술과 동시에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통증이 심해 독서는커녕, 챙겨간 노트마저도 손을 대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서 일에 대한 마음은 접어두고 오로지 회복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허락받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처음에는 불안감이 커졌지만, 회복에만 집중하니 불안감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신의 선물


상처가 아물고 통증이 가라앉으면서 오른손이 자유로워졌다. 수술 이후 한 동안 쓰지 못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씩 활동량을 늘려가는 시점에 펜을 잡았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했다.

작가로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생명력이 없는 것이다. 수술 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글을 쓰지 못했다. 수술 후에는 아프다는 이유로 글을 쓰지 못했다. 작가로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호흡이 곤란한 환자가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쓰지 않고 있어서 암에 걸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찾아온 암이 작가로서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신의 선물로 느껴졌다.


우리 인생에서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다. 운 좋게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다... 그러나 자기 여행을 소재로 뭔가를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때론 동행중에서 따라 시키는 사람이 생기고, 그 인상적인 실패 경험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걸 글로 쓸 것이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작가로서 암에 걸린 것은 행운이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소재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로버트 앨런은 “실패란 없다. 반응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건에 있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 실패를 실패로만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글로 쓸 수 있는 소재이면서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대화거리로 바라볼 수도 있다.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내가 처한 환경에서 감사하지 못하면 영원히 감사한 인생을 살 수 없다.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평균 37.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 세계적으로 범위를 높이면 40초에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자살 외에도 어린이들이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다 죽는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시점에도 교통사고나 질병, 암으로 숨지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간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암에 걸리고 수술을 잘 끝내고 글을 쓰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희망을 바라볼 것이라 기대한다.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감사하지 못하면 산소 호흡기를 뗀 상태이다. 내가 처한 환경에서 감사하지 못하면 영원히 감사한 인생을 살 수 없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곳에 감사가 숨어있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 나오는 글귀를 통해 내 인생의 숨어있는 희망의 빛을 키워본다. 


내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첫날은 나를 가르쳐 주신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꽃들과 풀과 빛나는 저녁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은 새벽에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별도 보겠습니다. 셋째 날은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낮에는 아름다운 영화를,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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