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긍정적인 사람이어야 하는 거잖아?
"엄마, 오늘은 N이랑 놀거야~ 오늘은 S랑 놀기 싫고, N이랑 놀고 싶어"
아들이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오늘은 N과 놀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S의 엄마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아들을 혼내듯 이야기하였다.
"친구끼리는 다같이 노는 거야... 그렇게 누구랑은 놀기 싫다고 얘기하면 못 써. 그리고 그렇게 싫다는 이야기를 하면 못 써~ J는 싫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더라~"
S의 엄마는 얼굴까지 울그락붉으락 했다. 물론 자신의 딸과 놀기 싫고 다른 아이와 놀고 싶다고 하니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었겠다.
한번도 싫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엄마로부터 들어본 적 없는 아들은 다른 아줌마가 싫다는 이야기를 하면 못 쓴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많이 당황해했다. 나는 순간, 댁의 아이나 그렇게 키우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다같이 노는 것이 좋다고까지만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걸, 싫다고 이야기하는 건 나쁜 아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말부터해서 싫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아들이 문제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 친구끼리는 다같이 친하게 노는 것이 더 좋다. 그러나 아들은 누가 싫고, 누가 좋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물론, 누가 싫고 누가 좋다고 이야기함은 물론 누군가를 싫어해도 된다. 그 엄마는 아들이 평소에 싫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에 대해 비난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왜 그랬을까. 엄마가 평소에 얼마나 싫다는 말을 아이 앞에서 많이 했으면 아이가 그런 말을 많이 할까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아이가 얼마나 부정적인지 역시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물론, 나는 아이 앞에서 싫다는 말을 많이 하지도 않지만, 아이들이 싫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지극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쓰면 안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주장기술'이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말을 하기 전에는 '울음'을 통해 자신이 타고난 자기주장기술을 펼친다. 자신의 뜻이 관철될 때까지 아기들은 빽빽 울어댄다. 한 시간씩 울어재끼는 아기들도 있고, 급기야 뒤로 넘어가는 아기들도 있다. 조금만 불편하면 울음을 통해 자신의 의사표현을 확고히, 뒤로 물러섬 없이 표현하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가장 먼저 자기주장기술을 펼치는 단어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싫어"이다. 그러니 이 '싫다'는 표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날 때부터 타고난, 예견된 자기주장기술인 셈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아이가 싫다는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하면 피곤해지고, 귀찮기 때문에 자기가 통제하기 쉬운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 싫다는 말을 자꾸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이 타고난 자기주장기술을 자꾸만 꺾으려고 노력한다. 싫다는 아이를 상대하는 것은 가끔 짜증나는 일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아마도 그 옛날 부모로부터 싫다는 말을 자꾸 하면 못 쓴다는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들 봤을 것이다. 안그래도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힘든 부모에게 자꾸만 자기주장을 하는 아이들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것이다. 이걸 꺾어놔야 자기가 편해지기 시작한다.
가끔은 싫어, 안 돼, 미워 이런 류의 말을 아이가 하기 시작하면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에 빠져드는 엄마들까지 보았다. 그런 엄마들 역시 그런 말을 하면 나쁜 아이라고 가르칠지도 모르겠다.
타고난 자기주장기술이 어렸을 때부터 꺾여진 아이들은 급기야 커서는 어디 가서 싫다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자기주장이라고는 잘 할 줄도 모른 채,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는 어른이 되어 버린다.
부모에게 싫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어찌 남에게라고 싫다는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며, 부모에게 자기주장기술을 펼치는 것을 거부당한 아이가 어찌 남에게 자기주장기술을 펼칠 수 있겠는가.
오늘, 혹시 아이에게 싫다는 말을 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고,
싫다는 말은 나쁜 말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나요?
그랬다면 아이의 타고난 자기주장기술의 싹을 일찌감치 잘라버리신 겁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는 남의 호의까지도 거절할 수 있음을 당연히 포함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호의를 거절하는 것을 대단히 실례인 냥 생각하는데, 그 호의라는 것이 제시하는 사람에게는 호의일수도 있겠으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호의가 아닐 때가 많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 우리 부서에 이 선생님 저 선생님 들러서 노닥거리곤 했는데, 내 옆에 앉은 할머니 선생님은 선생님들이 올 때마다 꼭 커피를 타 주셨다. 어느 날도 어김없이 할머니 선생님은 어느 선생님이 오자 커피를 타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은 혼잣말인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오늘 커피 세 잔이나 마셨는데..."
그 말을 들은 할머니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지금 호의를 베풀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커피를 네 잔 째 마셔야 하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건 결코 호의가 아니었다. 그 선생님은 네 번째 커피를 다 들이킨 후 우리 부서를 나갔다.
그 네 번째 커피로 인하여 그 선생님은 복통을 겪었을 수도 있었고, 그 날 밤 잠을 못 잘 수도 있었다. 그런데 거절도 못하고 커피를 꾸역꾸역 마셨다. 그 선생님도 어렸을 때 싫다는 말을 하면 안된다는 교육을 받았던 건 아닐까.
우리는 남의 부탁이나, 제안, 호의에 거절하는 것에 익숙지 않다. 나 역시 이런 글을 쓰지만 아직도 거절하는 것이 익숙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도 남들에 비하면 남의 호의까지도 잘 거절하는 편이긴 하다. 특히, 저렇게 먹기 싫은 것은 칼같이 거절한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늘 고민인 친구를 본다. 착한여자 컴플렉스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또라이 상사에겐 거의 밥이 되곤 한다. 그 연약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혹은 우습게 보려는 사람들도 많다.
오늘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 큰 것처럼 당신의 아이도 그렇게 키우고 있지는 않는지. 어쩌면 우리는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아래 싫다는 말을 묻어두고 사는 것은 아닌지.
싫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주 당연히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우리의 권리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또 우리의 몸을 지키는 생존기제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일찌감치 잘려져나가 상사 앞에서도 찍소리 못하는, 동료들 뒷담화에도, 불의에도 침묵하는 못난 어른이 된 것은 아닐지...
싫다는 말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당신의 마음이 부정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