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주적인 부모니까
"나는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늘 아이의 의사를 물어보고, 아이에게 결정을 하게 해"
"학원을 보내줄까, 네 스스로 공부를 할래 물어봤더니, 스스로 공부한대서 학원을 안 보냈어. 자기가 하고 싶다는대로 하게 해야지"
가끔, 자신이 얼마나 민주적인 부모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학원 가는 걸 즐거이 하는 아이들은 없을 것이므로 대다수의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학원을 가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아이들이 상당수일 것이며 이렇게 부모가 자신이 민주적인 부모임을 앞세워 아이에게 자신의 문제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 과연 그 아이의 행복감을 높여줄지에 대해서는 글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환자가 자신은 생전 처음 듣는 병명 앞에서 의사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치자. 민주적인 의사 혹은 자신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의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선택은 본인의 몫입니다. 만약 수술을 해서 나을 확률도 있지만, 수술을 했을 경우 완전히 기억을 상실하거나 언어능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술을 하지 않으면 1년 내에 사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낮은 확률이지만 수술을 해서 완치를 할 것인지 위험부담을 회피할 것인지는 본인이 선택하십시오."
의사는 선택권을 환자에게 주었지만, 그 선택권 앞에서 환자는 절대 만족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의사는 자신의 책임을 환자에게 떠넘기고 있기까지 하다. 만약의 의료사고에도 모든 선택은 환자 본인이 한 것이기에.
앞서 말한 부모들 역시도 자신의 부모로서의 책임을 아이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미성숙하고 판단력이 완전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이들은 그 무한한 자유 앞에서 결코 자유를 느낄 수 없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심리학의 선택의 과부하가설이다. 달리 말하면 선택의 역설이라고 한다. 우리 앞에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는 것이 자유라고 말하고 그 자유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지만, 그 많은 선택지 앞에서 인간은 오히려 불행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옛날엔 사람들이 한번도 만나지 못한 이성과 선을 보고 바로 결혼을 했다. 그것이 지금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불행하게 보일테지만 그들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잘 살았고, 아이들도 지금보다 더 많이 낳았으며, 이혼율도 지금보다 훨씬 더 낮았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연애를 하면서 어떤 한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을 한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상대와 살면서 이전에 만났던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그 이전의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도 해 보게 된다. 모든 이들이 이렇게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비교되는 또다른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이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며, 때로는 자신이 포기했던 선택지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우리는 늘상 고민을 해야만 한다. 이 회사에 취업할지, 저 회사에 취업할지, 이 사람이랑 결혼을 할지 말지,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심지어 오늘 점심으로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하는 연속된 삶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을 피로하게 하는 것인지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인생 자체가 선택의 연속이 되었고, 그것이 주는 피로함 속에서도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무수히 많은 상황 가운데 놓여 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도 이제 선택은 너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민주적인 부모의 모습인지 묻고 싶어진다.
선택의 역설을 말한 베리 슈워츠는 무한한 선택은 사람들에게 두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선택은 역설적으로 자유보다는 마비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너무 많다 보면 사람들은 선택 자체를 힘겨워한다. 두번째는 이러한 마비현상을 극복하고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선택권이 적은 상태에서 선택을 했을 때보다 덜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골랐으면 더 좋았을 것같은 상상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대안이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고 후회하는 만큼 선택의 만족도가 떨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선택 자체가 아무리 훌륭했다고해도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교할 대상도 없이 누군가 정해주는 짝과 결혼했던 사람들이 어쩌면 수많은 선택의 대상이 있었던, 그래서 쉽게 자신이 놓친 대안에 대해 비교할 수 있었던 현실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인생의 선택지 앞에서 아이에게 선택권 전부를 이양하는 것은 선택에 대한 실패 역시도 아이의 것으로 만들어 부모는 그것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그 과정에서 아이의 불안도와 불행감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적당한 선택지와 그 수준을 넘는 수준의 선택지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부모의 몫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