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순위별 성격이라는게 있을까요?
"혼자 커서 저래... 하도 오냐오냐 커서..." - 어렸을 때 가끔 듣던 이야기
"너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세상을 너무 몰라~" - 어른이 된 후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나와 단 한번도 내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커녕, 나에 대해 또 당신에 대해 서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의아함이 콧등에 묻어 콧방귀라도 뀌어야 시원할 것만 같은 느낌에 빠져들곤 한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자랐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편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오냐오냐 부모가 모든 걸 다 받아줬을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서 힘든 일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이런 생각들을 하는 듯 하였고, 종종 그와 같은 말들을 내뱉기도 하였다. 나도 내가 온실 속화초처럼 귀하고 예쁘게 자랐왔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다 생각한다.
요즘도 사람들은 나를 보며 고생 한번 안 해봐서 애를 키울 수나 있을까 싶었다는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내 외모가 그리도 고생 안한 것처럼 보이나보다. 아니면 혼자 자랐으니 당연히 그렇게 자랐겠지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었든지.
우스운 건 얼마전에 어떤 선생님이 내가 외동인지 몰랐다가 외동이라고 하자 정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외동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외동의 외모는 어떤 거냐고 묻자 외동들은 특유의 새초롬함이 있다는 말을 하기에 속으로 웃었다. 내 주위의 어떤 외동도 새초롬한 외모의 소유자가 없는데, 그 분 주위엔 얼마나 많은 새초롬한 외모의 외동딸이 있었을까. 어쩌면 드라마에 나왔던 뉘집 귀한 외동따님들을 너무 많이 보았던 건 아닐까. 그리고 내가 외동인지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그 분도 나를 미리부터 새초롬하게 봤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심리학 전공자이신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 공부를 헛했네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우리나라처럼 첫째는, 둘째는 그리고 막내는, 또 독자는 어떻다, 저떻다하는 나라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첫째는 독립적이고, 둘째는 눈치가 빠르고, 막내는 철이 없고, 독자는 안하무인이 아마 사람들이 흔히들 생각하는 성격의 유형인 듯 했다.
사람들이 요즘 사랑해마지 않는 심리학자 중 아들러가 출생순위별 성격의 유형에 대해 주장하였다. 그런데 아들러를 제외한 그 어떤 심리학자도 아들러가 주장한 출생순위별 성격유형에 대해 동의한 학자가 단 명도 없다. 정말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얼마나 설득력 없는 주장이었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아들러를 제외한 기타의 심리학자들은 출생순위별로 성격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타고난 기질과 양육환경에 의해서 주로 성격이 결정된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첫째니까 의젓해야지 생각하며 첫째를 양육하고, 둘째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홀로 크게 내버려두고, 막내는 자유분방하게 키운다. 그리고 외동은 혼자 크니 짠하기도 하고 어찌 될까싶어 애지중지 키우곤 한다. 그러니 아들러가 주장한 출생순위별 성격유형이 우리나라에서는 꽤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왔던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부모들은 첫째니까 어때야 하고 이런 사고방식들이 별로 없어 보였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출생순위에 따라 양육방식을 달리하는 것이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지금까지 외동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없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이미지처럼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까칠하고 도도해 보이는 인상을 깨려고 푼수처럼 굴기도 하고, 괜히 말도 터프하게 하기도 하고 그랬다. 혼자 자라서 버릇없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부단히 노력한 끝에 지금은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깍듯하게 예의를 갖춘다. 심지어 상대가 그것이 너무 불편하다고 말 할 정도로, 그 불편한 마음이 다 보일 정도로 말을 잘 놓지도 못한다. 어느 순간, 그게 너무 피곤해졌다. 그래, '나는 예민하다'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의 많은 굴곡진 역사들이 나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지 홀로 자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를 곱게 자란 사람으로 봐주는 것은 고맙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나를 가벼이 보는 것은 조금은 슬프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친구 중에 둘째라서 너무 서러운 친구가 있었다. 가족 중 아무도 그 친구의 생일을 챙겨주지 않아 혼자서 자신의 미역국을 끓여먹곤 했지만, 누구보다도 부모에게 잘 하는 아이였다. 자신이 잘 해야지만 부모에게 조금이라고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많은 둘째들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둘째를 가장 독립적이고 눈치가 빠르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냥 여러 가정의 둘째들은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해 서러울 뿐이고, 외로울 뿐이다. 그 외로움은 전적으로 부모의 양육방식의 탓이고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둘째로 태어났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한 둘째도 셋째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저 막내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결과론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일 뿐인 것을 마치 어떤 근거있는 이야기인 것처럼, 진리인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는 문제다. 요즘은 하도 혼자 자라는 아이들이 많아 혼자 자라서 저렇다는 이야기들을 쉽게는 못 할 것이다. 누군가의 자녀를 그리 규정 짓기에는 자신의 자녀도 걸리기 때문에. 혼자 자라는 아이들 중에서도 자유로운 부모 덕에 모험심이 강한 아이가 있고, 나처럼 규제 받았던 것이 많아 모험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이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과학적 통계도, 근거있는 자료도 없고, 아들러를 제외한 어떤 심리학자도 출생순위별 성격유형에 대해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의 혹은 남의 자녀를 향해 몇째이기 때문에, 홀로 컸기 때문에라는 말로 상처를 줄 것인가... 사랑한 만큼, 관심받은 만큼 잘 커나가는 존재들일 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