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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Mar 27. 2017

낡은 것들과의 이별

지운다. 지워나간다. 채운다. 채워나간다.

낡은 것들과의 이별.

어떤 익숙함에서 낯 섬으로의 이동... 가끔은 그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또 뭔지 모르는 후련함과 홀가분함기도 한다.


5년째 사용하고 있던 휴대전화와 그보다 더 오래 된 노트북을 바꾸었다. 노트북은 도대체 돌아가기를 주저하고 있어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매번 시험하고 있는 것만 같았고, 노트북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땐 이상하게 휴대전화도 같이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 때면 이젠 기계들까지 쌍으로 나를 농락하구나 싶었다. 잘 되지도 않는 것을 들고선 낑낑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은 제발 새 것으로 바꾸라고 했고, 조금만 더 버텨보자던 나는 결국 나의 인내심의 바닥을 확인하고선 동시에 둘 모두를 바꾸어 버렸다.


새 것이 주는 신기함과 뭔지 모를 후련함 앞에서 난 기존에 쓰던 휴대전화기에서 새로운 휴대전화기로 주소록을 옮기기 전 기존 휴대전화기에 입력되어 있던 주소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소록에는 처음 보는 것과 진배없을 정도로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누군지 도통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누군지 알지만 생전 전화 통화 한번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에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안고서 그래도 언젠가는 누군지 기억날지 모르고, 그래도 언젠가는 전화 통화 한 번이라도 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주소록에 있는 이름들을 차마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새 휴대전화를 마련하였고 거기에 헌 관계들을 놓아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주소록에 있는 낯선 이름들,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 연락 한번 서로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싫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지워나갔다. 어쩌면 관계를 맺지 못한 관계들이 이렇게까지 많이 나열되어 있는 것인지.


왠지 개운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이름들을 지우고 나서 몇 시간 후 정리되지 못한 관계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한번 더 확인했다. 정리하려고 마음먹고서도 그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던 마음을 만나며 첫 번째에서 미처 지우지 못했던 이름들마저 모조리 지워버렸다.


어쩌면 나는 그토록 많은 미련의 마음들을 관계들 가운데 가지런히 놓아두면서 살아왔던 것인지. 나의 미련과는 상관없이 정리를 당하고야 말았던 관계들 속에서도 차마 그 미련함을 떨치지 못하여 그 끈을 꼭 쥐고 있었지만 떨어진 끈이, 이미 누군가의 손에서 놓인 끈이 다시 이어진다거나 팽팽해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음을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이다.


누군가의 주소록에서 나의 이름도 그렇게 지워져 나갔겠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는 영영 잊힌 사람이 되었겠지.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맺었던 옛 친구가 나와의 친구를 과감히 끊은 것을 보며 그렇게 친구를 끊는 일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도 보란 듯이 끊고야 마는 사람들이 남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속과 주소록 친구를 끊는 것은 얼마나 더 쉬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의 페이스북 친구 끊기를 보며 씁쓸한 마음이 들어 한동안 실망감에 휩싸였다. 그 많은 페이스북 친구들 중 자기 하나 사라진다고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겠고, 나에게 자기가 중요한 존재가 아니니 그것이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거니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에게 나의 존재가 미미하니 나에게도 그의 존재가 미미하리라 생각한 투사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 아무리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냥 아는 사람도 아닌 한때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었던 사람으로부터 절교 아닌 절교 선언을 당한 것만 같아 쓰디쓴 나물 한 입 물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스치는 인연도 소중히 여긴다기에 스치는 인연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겨왔지만, 어쩌면 그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내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을지도.


오늘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어제도 만났고, 내일도 만날 것이다. 우리는 그 많고 많은 관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품에 안고 가게 될까. 나의 미련과 나의 마음을 줄 위에 올려두고선 상대가 다시 그 줄을 잡아줄 때까지 가볍디 가벼운 줄을 언제까지 잡고 있게 되는 것일까.


새로운 주소록의 사람들은 끝을 모르고 그 주소록에 남아 있게 될까...


지워고, 채우고, 다시 지우고, 또다시 채우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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