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술램프 예미 Oct 30. 2020

토끼와 거북 그리고 나무늘보

어린 시절, 토끼와 거북의 달리기 시합 이야기를 들으면서 토끼의 어리석음으로 거북이 순간 우직하게 묘사되는 것이 의문스러웠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함부로 자랑하지 말며, 그를 믿고 게으름을 피다가는 낭패를 당한다’가 동화의 주제이다. 포커싱은 토끼에 맞춰져 있어야 이 이야기는 교훈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토끼는 남에 대한 우월감을 가진 어리석은 동물로, 거북은 자기 갈 길만 바라본 근사한 동물로 그려지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거북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거북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거북의 우직함도,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은 것도 아닌 상대의 게으름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수혜 덕이었다. 하필이면 게으른 토끼를 만났을 뿐이지, 다른 토끼를 만났더라면 거북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거북은 질 게 뻔한 싸움에 뛰어든 상황판단의 미숙아이자, 자기가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인줄 모르는 자기 인식의 부재자이자, 토끼의 제안에 거절조차도 못한 소심쟁이였다. 게다가 모든 토끼가 그 토끼처럼 어리석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과잉일반화이다. 한 토끼가 자신을 과신하고 남을 깔봤을 뿐 모든 토끼를 그러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 건 인지부조화에 기여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거북에게로 초점을 맞춰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은 우연을 필연으로 가장한 작위적 접근에 불과하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네 길을 묵묵히 가라.

 어쩌다 거대한 상대가 게으름 필 행운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테니.

 아님, 말고.”


 원래의 동화 내용이 거룩한 것으로 확장되어 각색되면서 거기에 얼마나 많은 미화의 메시지들이 덕지덕지 붙었던가.


 이 이야기에는 애초에 나무늘보라는 등장동물이 한 마리 더 있었다. 나무늘보는 토끼와 거북의 시합을 저 멀리서 관망했다. 나무늘보는 저런 시합을 도대체 왜 하는지 의문스러웠고, 그런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나무늘보의 여유로움 대신에 경쟁에서의 성실함을 강조하고자 했었는지 이솝이 나중에는 나무늘보를 이야기에서 빼버렸다. 이때부터 우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나무늘보가 저 셋 중 가장 현명해 보이는데, 나부늘보를 빼버린 것은 경쟁의 필요를 강조하여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옭죄는 일에 기꺼이 투신하게 만들어 버렸다. 


 동화를 들려주던 어른들은 우리에게 늘 거북의 성실함과 우직함을 강조하면서 상대가 어떠한 사람이라도 겁먹지 말고 자기 갈 길만 가라고 강조하곤 했다. 마치 경쟁이 선인 듯. 그 선에는 결코 패배 따위는 없다는 듯. 그래서 우리는 쉽게 포기할 수도, 강한 상대 앞에서 겁먹은 척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경쟁을 배우는 대신 함부로 경쟁하지 말 것을 배울 기회를 박탈당했다. 


 “둘 중 누가 이기든 한 사람은 좌절할 수밖에 없고, 열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러한 경쟁에서 교훈을 배우기보다 쉽게 남과 경쟁하고 시합하는 피곤함을 경계해야만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제안하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경쟁이 싫으면 경쟁하지 않을 권리도 우리에겐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타인을 이기고 타인보다 우월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존재 가치가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회적인 위압은 완강히 거부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빠른 토끼가 느린 거북을 이긴다고 해서 더 우월해지는 것이 아니며, 느린 거북이 빠른 토끼를 이긴다고 해서 더 우월해지는 것도 아니다. 이왕에 경쟁을 하려면 비슷한 힘의 사람과 해야지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한, 열등감을 벗기 위한 경쟁은 긍정적 자아 인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이렇게 배웠더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금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부모와 선생님, 어른들 중 단 한 사람만이라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친구를, 동료를 경쟁 대상이 아닌 존귀한 개개인으로 바라볼 수 있지는 않았을까. 나무늘보가 등장했더라면 어른들도 이 동화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이전 11화 모두가 말하고 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