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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Oct 30. 2020

모두가 말하고 싶다

듣는 일에 최적화된 기질과 성격을 갖춘 사람도 때로는 너무너무 말하고 싶은 날이 있는 법이다. 아니다, 말은 바로 해야 한다. 듣기를 잘 하는 기질과 성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 싶은 욕구는 식욕만큼이나 인간 본성에 내재된 거니까. 다만, 주로 듣는 일을 하는 사람,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그러한 태도를 오랜 시간 동안 갈고 닦아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듣는 실력과 인내심이 뛰어난 사람도 가끔은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되찾고 싶어진다. 


 어렸을 때는 무슨 고민이나 이야기를 해봐야 누가 뾰족한 답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라 쉽게 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해결책이 없는 문제에 혼자 골머리를 앓을 때보다 둘이 같이 문제에 빠지는 순간, 이자에 이자를 더 해 더 골 아픈 문제가 되는 것만 같았으니. 어른이 되어서는 더 쉽게 남에게 내 문제를 이야기하지 못 했다. 그 문제 하나를 이야기하려면 나의 지난 날, 내 역사 모두를 끄집어내야 하는데 그 무지막지한 서사를 이야기하기에는 시간과 나의 인내심, 남의 관심 모두가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자연스레 남의 말을 주로 듣는 사람이 되었다. 나 혼자 그렇게 정의내린 것이 어느덧 모두에게 그렇게 통용되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즉, 내가 남의 말을 듣는 편에 속하는 인간이라는 분류를 혼자서 해 오다가 이제는 내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를 모두가 알아버린 것이다. 더 골치가 아파졌다. 내 문제에 더해서 남의 문제까지 떠안는 일이 빈번해졌으니. 


 무슨 용건이 있거나 할 말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다가도 나는 이내 내가 왜 전화를 걸었는지 잊어버린 채 남의 말을 듣다가 전화를 끊곤 했다. 궁금한 것도, 용건도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왜 전화했느냐는 물음도, 잘 지내느냐는 안부도 없이 자신의 어마어마한 문제부터 들이미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내 용건이 뭐냐면...’ 이라는 말을 어떻게 쉽게 할 수 있었겠는가. 궁금한 것은 포털사이트에나 물어보면 되고, 용건도 조용히 다음을 기약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문득 억울해졌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는데, 내 이야기는 정작 하나도 하지 못하고 듣다가 끝이 나는 전화라니. 잘 지냈느냐는 한 마디에 자신의 슬픈 이야기, 어려운 사정 등을 이야기하는데 어찌 내 용건을 꺼낼 수나 있을까. 전화를 하면 쏟아낼 하소연이 그렇게들 많으면서 내가 먼저 전화할 때까지 사람들은 말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의아하기만 했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먼저 전화를 해서 말 할 일이지 남이 전화를 했을 때 ‘이 때다!’ 하고 속사포처럼 할 말을 쏟아내는 건 마치 술을 진탕 퍼마시고 나한테 다 토해버리는 느낌이었다. 내 온 몸과 마음에서 오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린 시절 학교에 다녀오면 아빠한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친구들과도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친구들도 죄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이 정체불명의 시공간에서 나의 말은 메아리가 되어 내게로 다시 돌아온다. 자기 이야기는 먼저 할 수 없고 제 목소리는 오직 저에게만 당도하도록 저주를 받은 에코마냥.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의 말을 즐겨 듣기보다 자신의 말을 하고 싶어진다. 어린 시절에야 관심의 중심에 있어보는 일이, 나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부터는 관심의 변방에서 누구 하나 나에 대해 묻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지내느냐는 말 한 마디에도 자신의 모든 걸 쏟아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전화가 가장 큰 연락의 수단이었을 때는 오히려 대화를 할 일이 더 많았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메신저가 등장하면서부터 전화가 새삼스러워졌다. 언제 연락이 될지 몰라 수시로 전화를 하던 때보다 언제든지 연락이 가능해진 지금 소식은 더 전하기 힘들고, 통화는 더 귀해진 것이다. 전화 통화는 점점 더 낯설어졌다. 목소리로 대화를 할 때는 대화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다음에 대화를 다시 하자는 기약이나 인사도 없이 툭 시작했다가, 툭 끊어지는 일이 일상다반사다. 이런 대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 것처럼 통화도 그렇게들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밑도 끝도 없이, 인사도 없이 자기 말만 쏟아내듯이.


 아주 때때로 만남은 마주침이 되고, 대화는 주절거림이 된다. 만나도 만난 것 같지 않고, 대화를 나눠도 대화를 한 것 같지가 않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것, 먼저 안부를 묻고, 먼저 이야기를 건네는 건 대부분 자기 목적적 이유 때문이다. 특별한 용건이 있든, 외로움에 사무치든. 심지어 상대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하는 것도 내 궁금증과 염려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내가 안부를 물어봐주면 상대도 내 안부를 물어봐주겠거니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일인지, 어떤 용건이 특별히 있는 건지부터 묻는 것으로 전화의 대화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용건을 먼저 나눈 후에는 얼마든지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다 내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면, 상대의 용건은 묻히기 일쑤이니까. 


 전화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어떤 규칙 같은 것이 만들어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전화를 하고, 전화를 건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원칙. 전화를 받은 사람은 무조건 전화를 건 사람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고, 자기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먼저 전화를 하면 된다는 그런 인간관계의 규칙 같은 것을 만들어 공평하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쉽게 묻히는 일 같은 건 없어지지 않을까. 이번에 내 이야기를 했으니, 다음에는 네 차례가 되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밥을 사면 다음에 만났을 땐 다른 사람이 밥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외로움에서 구제해줄 수 있지 않을까.


 외로움이란 말하고자 하는 두 욕구가 충돌하고 둘 중 하나의 욕구가 좌절되었을 때 일어나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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