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다는 말을 어떻게 해요? 그것도 상사한테?”
“싫다는 말을 왜 못 하죠? 나는 하는데.”
어느 커뮤니티에서 설전이 오갔다. 상사에게 싫다는 말을 어떻게 하느냐는 여론에, 한 사람이 왜 싫다는 말을 못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다수는 자신들이 갑자기 소심한 사람처럼 손가락질이라도 받는 듯 여겨졌는지, 공감 능력 떨어지는 한 사람에게 공감의 참뜻을 알려주고 싶기라도 했는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다수도, 공격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자기주장을 애써 굽히지도 않았다. 속으로는 무척 떨고 있었을지 몰라도 숨지 않는 태도 자체가 내게는 대범하게 만 보였다. 그는 계속 주장했다. 상사에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다고 결론내린 채 모두가 그에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싫음의 표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힘없는 자 스스로 깨야 하며, 어떻게 하면 직장 상사에게도 당당하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있는지를 같이 고민하고 그러한 사회적 환경이 될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할 때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싫다는 말을 못 한다고 결론 내린 사람들에게 바보라고 조롱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래서 계속 싫다는 말을 못 하는 것에 소극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함의가 이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댓글을 달았다.
이후로는 논란이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우리가 모두 하나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체념해 왔음에 대체로 동의한 것이 아닐까, 모두가 답은 모르지만 해결은 해야 한다는 데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음이 아닐까 혼자서 조용히 결론을 내려 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똑부러지고도 당당한 동생이 있다. 지구를 통틀어 가장 당당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상사가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하면 곧바로 거기에 항의를 한다. 무언가 부당하다거나, 잘못 돌아가고 있다 싶은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생을 어려워해서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 한다.
동생에게 여느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남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을 자신의 지나친 자의식 과잉 때문이라 생각하지도 않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어려워하는 것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다. 즉, 자신이 문제 제기를 하는 것 자체를 문제로 여기지도 않으며 문제 자체를 오직 문제를 일으킨 사람의 문제로만 여긴다. 무엇보다 그는 그러한 태도를 자주 취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신기한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 싫다는 말은 일상의 언어일 뿐 전혀 어색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그에게는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네가 너무 과민한 것이 아닌가”하는 반응을 보이고 심지어 본인조차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등등의 의문으로 남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검열을 하기 시작한다. 문제의 당사자보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때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옷을 입은 것처럼 영 불편지고야 마는 상황도 연출된다. ‘다른 사람들은 바보라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서야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느냐’ 등의 말들이 뒤따르면서 집단적 암묵을 더욱 더 공고히 하기도 한다.
이는 아랫사람, 힘이 없는 사람은 참아야 한다는 권력에의 강압에 대해 승인한 결과이며, 모든 조직이 힘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흘러왔던 까닭이다. 그리고 아주 긴 세월 동안 유교적 질서와 가르침 아래에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는 것을 터부시해왔고, 개인보다는 집단 자체가 더 중시되어온 집단문화의 사조가 사회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남의 이목, 남의 의견, 남의 평가와 판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체면문화까지 뿌리 박혀있지 않나.
이러한 영향으로 반박하는 사람, 의사 표현을 정확히 하는 사람은 희귀해지고, 상사에게 어떻게 싫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와 그걸 왜 못 하느냐의 의견이 서로 충돌하며 싸우는 상황도 생겼다.
인간 대 인간은 서로 동등하다고 배웠는데, 어째서 우리는 동등하지 못함을 수긍하며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적대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동등하기 위해 할 말을 하는 사람을 향해 공동체의 분위기를 해치는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운 것일까.
마음껏 싫어하는 날, 마음 놓고 싫어해도 좋을 날과 달을 정해놓은 적이 있다. 그 날엔, 그 달엔 웃고 싶지 않으면 절대 웃지 않겠다고도 다짐했다. 상사가 권하는 커피를 거절했다. 상사가 가야 한다는 회식에 못 간다고 말했다. 아니, 퇴근 이후에는 아이를 돌봐야 해서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상사보다 먼저 칼 퇴근을 하면서도 눈치 보지 않고 제 시간에 가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지극히 당연하게 행했다. 처음엔 눈이 따끔거리고 아주 자주 뒷목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나의 거절에 다소 멋쩍어하는 사람도 있었고, 6시 땡 하면 인사만을 남기고 가버리는 칼 퇴근에 뒷담화(희한한 건 상사는 정작 말이 없었지만, 다른 동료들이 뒷담화를 한다는 거였다)도 오가는 듯 했지만, 대놓고 뭐라는 사람도 없었다. 남의 싫음에, 남의 하지 않음에 혹은 행함에 누가 뭐라고 하기도 사실 힘든 거였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도 될 일, 미리부터 걱정하지도, 겁먹지도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