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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Oct 30. 2020

아버지의 아들

“조OO 씨입니까?”

 “네, 전데요.”

 “경찰서입니다.”


 경찰서라고 하니 뉴스에서나 보았던 보이스피싱 사건들이 떠오르면서 어서 끊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찰나의 고민을 했다. 번호도 일반 번호가 아니라 휴대전화 번호가 찍혀 있고. 고민하는 내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 냥 경찰은 얼른 다음 말을 이었다. 


 “혹시, 조 아무개 씨를 아시나요?”


 조 아무개라면... 그라면...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나와는 남매가 아닌 사이. 나이 차이가 20년은 넘게 나서 오빠라고 할 수도 없는 사이, 나이 차이가 적게 난다고 해서 오빠라고 부를 수도 없는 사이. 서로의 이름만 아는 사이. 알지만 모르는 사이.


 순간, 알지만 모르는 그를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래서 질문을 질문으로밖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왜요?”

 “사망하셔서요.”


 죽었다고 하지 않고, 사망했다고 하는 것은 사적인 일을 전달할 때 쓰이는 표현이 아니라 공적이거나 죽음이 사건일 때만 쓰이는 말이다. 죽음이 객관화되는 과정이며, 죽은 당사자가 존재에서 대상화되는 순간이다. 


 “왜 돌아가셨어요?”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알아봐야 해요. 가족이 아무도 없는데 조OO 씨가 뜨더라고요.”

 “어머니가 계시지 않나요?”

 “어머니는 벌써 돌아가셨지요.”

 

그와 딱 한 번 통화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버림받은 아버지에게 빚까지 물려받는 불행을 겪을 것이 안쓰러워 아버지의 수첩 속에서 전화번호를 찾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빚을 남기셨으니 상속 포기 신청을 하라고. 그게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배려였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를 향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갔었다. 그의 어머니와 이혼을 하면서 떨어져 지낸 자식이었으나 늘그막에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 날 아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았다. 아들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대뜸 주먹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때렸다고 했다. 어쩌면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꼭 복수해주리라 다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로부터 단 한 치도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아버지는 불행을 예비한 사람이었고,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였으며, 불행의 끝이었다. 


 버려진 상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한과 아픔 그래서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을 슬픔, 끝까지 과거와 싸웠을 처절함, 부모의 이별을 보며 사랑을 믿지 못했을 완고함, 돌봐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을 외로움, 신에 대한 원망, 세상을 향한 분노, 죽는 순간 엄마를 애타게 불렀을 처량함. 그 사람의 마음을 나는 이 정도로밖에 짐작할 수가 없다. 


 자신의 죽음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딸에게 전해졌다. 세상에 더 이상 자기가 없다는 것을 나 한 사람, 그리고 내 남편 이렇게 단 두 사람이 알게 되었다. 모르지만 아는 나의 눈물이 그나마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어떤 누구에게도 필연적 구속력을 갖지 못한 존재는 우연한 사태로 전락하곤 한다. 그에게 나도 나에게 그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연한 이의 우연한 소식을 듣고선 하루 종일 울었다. 


 나는 천국으로 사람들이 돌아갈 때 이생에서 가장 상처가 없는 순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영원히 천국에서 살 거라고 상상한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 생에서처럼 어떤 물질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없는 영혼의 모습으로 떠다닐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을 테다. 그들이 말하는 천국의 모습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으니까.


 어느 드라마에서 저승사자는 죽은 사람들에게 생의 기억을 잊게 하는 차를 마시게 한다. 생의 기억을 가지고선 천국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과 천국은 완벽한 대비이니까. 그런데 상처 이전의 모습, 가장 행복한 순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천국에 머물 수 있다면 굳이 그런 차는 마실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가 천국에서, 상처받지 않았던 가장 어린 순간으로 돌아가, 한 쪽에는 아빠 손, 다른 한 쪽에는 엄마 손 잡고 생에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며 지내기를 조용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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