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술램프 예미 Oct 30. 2020

감정과 이성의 대결

열등함과 열등감은 분명 다른 말이다. 누가 봐도 열등함이라곤 없는 사람 같아 보여도 열등감은 있을 수 있다. 왜 그게 열등감인지 모를 때조차 자신은 열등하다고 우겨대는 사람을 보면 열등감이 열등함을 결정하고야 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누군가는 그 열등감을 시기한다는 데 있다. 내게는 열등감일 뿐인 것을 남은 그렇게도 가지고 싶어 안달한다. 이러한 현상은 내게 있는 특성은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고, 남의 것은 좋아 보여서일까. 아님, 나의 열등과 다른 이의 욕망이 공교롭게 서로 맞아떨어져서인가.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가슴이 큰 것에 항상 콤플렉스를 느끼던 친구가 있었다. 여학생들에겐 그게 그렇게도 부끄러운 일인지 꼭 체육시간이면 윗도리 안에 손을 집어넣고선 윗도리를 앞으로 봉긋하게 해서 뛰는 학생들이 있었다. 어떠한 바람도 자신의 가슴에 와 닿아 마찰을 일으키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친구의 가슴에 신경을 안 썼을 텐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이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을 당사자는 전혀 모른다. 그냥 자신은 누가 보든 말든, 가슴의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만을 막고 싶은 거다. 근데 그게 가슴이 작은 사람 입장에서는 도무지 왜 콤플렉스인지를 모르겠는 거다. 수술을 해서라도 큰 가슴을 갖고 싶은 사람은 그러한 행위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슴이 크면 좋지 왜 열등감을 느끼느냐고 묻는 것은 친구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애초에 열등감에 대해서는 남에게 설득될 의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설득하려는 순간 각자의 인식의 차이만을 확인할 뿐이므로.


 그렇다면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가슴이 큰 사람 앞에서는 작은 사람이 열등한 존재인가? 아니면 가슴이 커서 열등감을 가진 사람에겐 가슴이 작은 사람이 오히려 우월해지는 것인가? 보통은 키가 큰 사람이 우월하고 키가 작은 사람이 열등하다고 인식하는데, 키가 너무 커서 늘 열등감에 시달렸던 여성은 한번이라도 아담한 여성으로 살고 싶은 열망이 가득할 텐데, 키가 작은 여성은 그녀 앞에서만은 우월해지는 것인가. 자신도 고목나무의 매미가 되어 남성의 품에 쏙 들어가고 싶다는 뭐 그러한 열망 앞에서는 키가 큰 것은 오히려 열등한 것 아닌가. 


 못 먹고 살던 옛날 시대에는 뚱뚱하고 배가 나온 것이 부의 상징이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표징이라 말하고, 옛날에는 동그스름한 얼굴형을 최고로 여겼는데 이제는 턱이 세모에 가까운 계란형이 미인형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고, 열등함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왜 그 상대성 안에서 계속해서 패배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열등함이라는 것이 진짜 열등해지려면 우선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나는 열등하다’는 생각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래도 쟤가 나보다는 낫네’ 이런 생각이 있어야 남을 시기하고 부러워할 수도 있다. 열등감은 감정인데 그것을 이끄는 것은 우리의 생각인 것이다. 생각과 판단이 있어야 감정이 탄생한다. 친구가 체육시간만 되면 윗도리를 앞으로 내밀고 달렸던 것은 “바람 때문에 옷이 딱 달라붙어 가슴이 부각되면 친구들이 다들 내 가슴만 볼 거야. 그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이 없었다면 열등감이라는 감정 자체도 없다. 이미 큰 가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우리는 다 인식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친구의 큰 가슴을 보며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생각이 스스로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만들어 내었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열등하다”로 바뀌어야 한다. 사실, 열등감 말고도 수많은 감정들이 이성의 판단착오 아래서 패배를 맛보고 있다. 이성이 결정하면 감정은 그에 따라 가면서 노예로 종속되고, 사람들은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선 계속 자신의 감정 탓만을 해대는 식이다.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야”라는 생각은 여러 가지 감정을 종속시킨다. 때로는 열등감, 때로는 수치심, 또 때로는 패배감, 모멸감, 죄책감 기타 등등. “쟤는 정말 이상한 인간이야” 역시도 오만, 분노, 짜증, 우월감 등등을 양산해 낸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이성이 감정을 하부로 만들고 급기야 우리의 자아까지도 생각의 발아래 묶어두는 것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열등감으로 열등감이 다시 열등함으로의 굴레를 회전한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노예이다”로 바꾸어야 더 옳지 않겠는가. 이성적인 사람이 되게 좋아 보일 것이다. 감정적인 사람은 되게 못나 보일 것이고.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감정적인 사람은 뭐에 구애되는 것이 없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에 충실하므로. 그리고 남에 대해 그리 비난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사람은 남을 굳이 비난할 이유가 없다. 꼭 무언가에 얽매이고 구속된 사람들이 답답한 심정에 남을 흠집 내는 것이지. 그렇기에 이성적인 사람들은 남을 쉽게 판단하고 비난한다. 게다가 이성적인 자신을 무척이나 쿨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의 노예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무리 인류가 이성에 의해 발전하고 무언가를 이루어냈더라도, 하루 종일 생각 안에 갇혀서 돌아가고 있는 개개인의 삶은 의식의 전쟁 상태를 겪고 있을 뿐이다. 감정과 자아 모두 생각에 종속된 삶을 끊기 위해서는 본인이 생각의 노예라는 것부터 받아들여야만 한다. 본연의 평화는 그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