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술램프 예미 Oct 30. 2020

지난 자신과의 싸움

가끔 남들을 쉽게 비난하고 싸움을 거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들이 남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기와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싸우는 중이다. 표면적으로는 상대가 적인 것 같지만, 문제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대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는 과거의 총체가 싸움의 대상이다. 그것을 본인도 알면서 모르는 척할 때도 있고, 남은 아는데 자신만 모르기도 하고, 무의식중에 억압하고 있기도 하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 눈에는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 묘하게 눈에 띈다. 친구가 없는 사람은 친구가 많은 사람이, 재능이 없는 사람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미모가 떨어지는 사람은 예쁜 사람이. 인간의 불행은 상대의 과잉이나 충분으로부터 자신의 결핍을 쉽게 발견해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유적처럼 내면에 깊이 숨어 있던 것이 발굴되기라도 하면 상대를 기어이 흠집 내야 직성이 풀린다. 신체의 각 기관과 마음이 합심하여 기어이 싸움을 걸 시도를 한다. 자신의 경험, 과거, 상처 등은 어떻게 해결할 수 없으니 그를 자극한 사람을 흠집 내고 파괴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잘 난 사람을 뒷담화하는 사람은 자신의 못남에 대한 열등과 결핍을 스스로 채우는 대신 상대를 못 난 사람으로 끌어내려야 뒤틀린 마음이 풀린다. 애정을 주어야 할 부모에 대한 결핍이 심한 사람일수록 좋은 부모를 둔 사람을 보면 베알이 꼬인다. 자신의 결핍 때문에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들통나는 날에는 자신의 못남만을 드러내는 꼴이니 어떻게 해서든 그럴싸한 다른 이유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잘난 사람에게서 재수 없음을 증명할 사건 하나를 창조하고 재해석함으로써 그가 욕을 먹을 수밖에 없음을 정당화한다. 자신의 열등감은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겨 놓고서.


 내게는 좋은 부모를 두고 그 부모를 자랑하는 사람이 열등감의 기폭제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미완성이었고 부모도 부모됨의 과정 중에 있었으므로 남의 부모를 보며 자극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 큰 후에는 모든 상황이 결판이 났고 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음에 대한 결론이 지어졌으므로 남의 훌륭한 부모가 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좋은 부모를 뒀으면 뒀지, 자기만의 일기장에 기록이나 할 것이지 왜 모두가 보는 곳에다가 버젓이 그걸 적어놓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건 나와 싸울 일이지 그와 싸울 일이 아니다. 그에게도 자신의 것을 향유할 권리가 있으므로 남의 자산에 깽판 놓을 권리 같은 건 내게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배알은 꼬이므로 좋은 부모를 드러내는 글인 것을 직감하는 순간 빠르게 스크롤바를 내려버린다.


 비슷한 경험을 당한 적이 있다. 남편에게 음식을 떠먹여줬다고 어떻게 자기 앞에서 그럴 수 있느냐며, 남에 대한 배려도 없고 매너도 없다며 누군가에게 욕을 먹었다. 평소에 남편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스타일이 아닌데 그날 그렇게 했는지 어땠는지 내 기억엔 전혀 없는 사건이었지만 상대에겐 완벽하게 각인된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 남편도 아니고 내 남편에게 아내인 내가 음식을 떠먹여주는 것이 그에게 왜 매너 없는 행위인지 도무지 이해불가였다. 그런데 그녀에겐 내 옆에 남편이 앉아있는 것 자체부터 자신의 결핍을 확인해야만 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혼을 했고, 그래서 남편이 없어진 그에게는 먹여준다는 행위 자체가 그를 자극했다.


 그런데 이 싸움을 나와 하는 것이 맞는 것이던가. 내가 그녀를 자극한 것인가, 그녀가 자기 자신을 자극한 것인가. 나는 그녀가 이혼을 했다는 것 자체도 의식을 하지 못 했지만, 여보란 듯이 남의 아픈 데를 긁기 위해 애써 남편에게 무언가를 먹여주는 사악함까진 장착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에겐 자신을 자극하고 부러워하라고 의식한 행동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해서 미안하다고 내가 사과해야 하는 것인가. 나에게 화풀이를 하며 나를 향해 매너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오해와 감정, 결핍과 분노 사이에서 방황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싸움을 남과의 싸움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를 테면 누가 나와 내 친구를 차별하며 나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는데, 부당한 대우를 한 당사자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시비를 거는 식이다. 옳은 당사자와 싸우는 대신 자신이 이길만한 대상과 싸움을 시도하거나,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나쁜 감정을 옮길 만한, 옮겨도 되는 사람에게 쏟아낸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과 싸우는 대신 남의 사정과의 싸움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것이 본인에게 훨씬 더 유리하니까.  


 아무도 상대의 결핍을 자극하고자 자신이 가진 것에 행복해하지 않는다(물론 그러한 나르시시스트와 소시오패스 등의 정신질환자는 여기서 논외다).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을 건드렸다는 것은 나의 착각이자 자기기만일 뿐이다. 나를 불행하게 만든 건 나의 부모이고, 과거이며, 가난이자 무력함이고 때로는 나 자신이다. 피를 흘리더라도 지난날과 치열하게 싸워서 이기든, 남의 행복을 기웃거리지 않는 방법으로 자신을 위로하든 해야지 남을 파괴하는 기묘한 방법으로는 더 쓸쓸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남을 저격하며 나를 지키려 들 때, 남도 나를 손가락질하며 자신을 지키려 들 테니.

이전 05화 출근길 싸움 구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