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술램프 예미 Oct 30. 2020

밥 먹을 힘은 있는지

“조 선생, 젓가락 안 챙기고 뭐해!”


 다들 엄마의 챙김이 지나쳤거나, 그에 대한 결핍이 지나쳤거나 둘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런 대접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런 대접을 못 받아봐서 남을 들들 볶는 것이거나. 꼰대거나 애정 결핍자이거나. 사실, 꼰대에 더 가까운 거지. 부하직원(이라는 말을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이 생긴다면 좋겠지만)이 진짜 부하라도 되는 줄 알고 젓가락을 자기 앞에 대령하라는 꼰대 오브 더 꼰대. 젓가락을 챙기라는, 게다가 집에서도 젓가락의 짝 따위는 맞추지 않는데 짝까지 맞춰서 달라는 상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밥도 떠 먹여 드려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젓가락 하나 챙길 힘도 없는 듯 보이는데, 숟가락 들고 밥을 먹을 수나 있는 건지.


 간혹 자신의 위치나 지위를 젓가락 같은 것에 두는 사람들이 있다. 그걸 그렇게 확인하고 나면 일종의 희열감이라도 느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누가 내 앞에 무언가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자기만족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어른이 굳이 다 큰 어른을 챙겨야만 하는 상황도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젓가락과 숟가락 등은 스스로 자기 것을 챙길 능력이 안 되는 아이에게나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나 챙겨주는 것 아니던가. 그런 것으로 자신이 대접받는 어른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겠다는 것이 지극히 모순이지 않나. 어린 자아로서의 결핍과 동시에 다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고 있으니.


 조 선생이라고 부르면 항상 젓가락을 챙기라는 말이어서 나는 그 호칭이 참 싫었다. 나중엔 알아서 챙기고 있는 내 모습이 더 싫었지만. 게다가 ‘님’이라는 접미사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이란 말인가. 동료 중에서도 님이란 글자를 빼고서 나를 부르던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같이 입사한 동료였다.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들도 선생님이라고 불렀지 선생으로 부른 사람은 없었다. 그가 나를 ‘조 선생’이라고 부를 때는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암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굳이 너를 조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호칭 내내 담았다. 


 젓가락 정도는, 호칭 정도는 참아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일 수도 있겠다. 은근히 거슬리는 거라 대놓고 뭐라고 했다가는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 한마디에 참패를 맛볼 수 있는 정도의 분위기나 눈초리, 말투 등은 뭐라 꼬집을 수도 없어 더 억울하다. 그 보다 회사에서 훨씬 더 괴롭힘을 당하고 곤경에 처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라 자위할 수밖에. ‘우리 회사의 7대 불가사의’라는 제목의 글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 중에는 ‘저 인간이 팀장이고, 저 인간이 부장이다’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직장인들의 현실 자체의 문장이지 뭔가. 


 친한 동생도 팀장이라는 사람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다. 젓가락 정도 챙겨 달라는 것은 아기 수준의 앙탈에 불과할 정도다. 직장 상사는 대놓고 밥을 떠먹여 달라던 사람이었다. 무엇이 먹고 싶다, 자기는 뭐를 좋아한다며 동생에게 반찬을 만들어오라고 부탁 아닌 요구를 하곤 했으니 밥 먹여 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건 친정 엄마한테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늘 동생을 괴롭히던 사람이었다. 동생을 왕따시켰고, 일처리가 마음에 안 든다며 볼펜으로 머리를 때렸고, 뒷담화를 일삼았다. 반찬을 해 달라던 요구도 일종의 괴롭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채택했을 것이다. 동생은 결국 다른 직장으로 옮겼다. 물론 이런 팀장과 저런 부장은 다른 직장에도 모두 있을 것이므로 직장을 옮기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단 더러운 것을 피해야 살 것 같으면 그래야지 별 수 없다. 더 더러운 것을 만나게 될지라도.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속담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결국엔 받아들여 또라이는 세상천지 어디에든 있으니 그냥 이 곳에 익숙하고 말자고 다짐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꼰대 짓이든, 굴종감을 발굴해내기 위한 짓이든 무엇으로 그들의 행위들을 규정하고 명명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위에서 군림하고 싶은 욕구를 행위로 드러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마음먹기가 어려운 것도, 그렇다고 그것을 실행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리 큰 노력이 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희열감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렵지 않고 적당히 자아도취에도 도움이 되는 행동을 모든 사람이 하고 있지는 않다. 모두가 그를 행동화 내지 표면화하지 않음을 봤을 때 그들의 말과 행위가 남들과 얼마나 차별화된 저열함과 유치함을 증명하고 있는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우리는 희열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움도 느끼는 존재들이니.


 모멸감, 공포, 혐오 등의 감정들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감정이라면 죄책감은 남을 보호하기 위한 감정이다. 때로는 나로부터, 때로는 불의로부터, 때로는 타인으로부터 남을 지키는 감정인 것이다. 죄책감을 상실한 인간은 오직 나의 감정의 발산과 그로부터 비롯된 쾌락에만 중점을 두거나 자신의 권리와 인간성을 보호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 타인의 존재 가치도 훼손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모른다. 


 우리는 수많은 먹이사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먹이사슬의 가장 정점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잡아먹히지 않을 정도까지 오르고 나면 자기가 있던 자리에 있는 사람을 잡아먹을지, 연민을 느끼거나 보호할지를 결정하곤 한다. 때로는 결정하는 의지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매커니즘이 작동될 때도 있다. 


 어느 폐친이 ‘기업의 좋은 지배구조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자신의 담벼락에 올린 적이 있다. 지배구조라는 것은 그도 모르게 자신의 무의식에 저장돼 있었던 말일 것이다. 직원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의식했든, 하지 못했든 그 앞에 ‘좋은’이라는 형용사 하나만 갖다 붙인다고 해서 지배구조가 지배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지배’라는 단어에서 ‘좋은’이라는 단어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하려는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선민의식에 사로잡혔거나.


 오늘도 누군가는 지배에 지배당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회사 가기 싫다’를 여러 번 되뇌며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전 03화 알 필요가 없는 것을 모를 자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