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술램프 예미 Dec 08. 2023

좌절할 수 있는 어른이 된다는 것

우영우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 대한 환상은 

혼자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지팡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팡이는 사람을 더욱 약하게 만들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진실은 힘없는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자신에 대해 진실을 아는 것은 그 자신의 힘을 크게 좌우한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해 진실을 안다는 것은 현실적인 자신, 즉 자신이 현재 놓여 있는 위치를 아는 것을 뜻한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검증이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게다가 정확한 자신의 위치 파악은 자기에게 필요한 자원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게도 한다. 하지만 신경증에 걸린 사람들은 이런 검증을 할 생각도 없이 ‘무조건 해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를 가진다.


 어느 날 동료가 자신은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겠다. 평소 그가 지나친 알코올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설을 세워보면, 그가 외로움을 느끼는 자신을 도저히 해결할 방법을 몰라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억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좌절감을 직면하는 것은 마치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니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우영우는 이렇게 말한다.      


 “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저는 성인이잖아요”     

 

 그는 욕구의 좌절, 무언가의 부재 앞에서 느끼는 상실이나 절망이 체념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향해 가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좌절과 독대할 수 있는 어른이었으며 좌절을 자아의 위협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가 좌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오히려 그를 어린 아이로 바라보고 있었을 뿐. 우리는 가끔 자신의 가치가 강등된 것이 사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에 좌절을 느낀다. 그래서 좌절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건 마치 남의 좌절을 구경하는 것은 괜찮아도 내게 좌절이 왔을 때는 ‘왜 나만?’,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생각에 갇히는 것과도 같다. 남의 좌절을 보면 연민하고, 조언하고, 또 때로는 묘한 안도감에 빠지면서 내가 좌절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펄쩍 뛴다.


 그런데 회전문 하나도 혼자서 통과하지 못하는 영우는 좌절을 오롯이 책임지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귀찮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좌절을 막기를 원했던 주변인들은 그의 좌절이 귀찮았을지도 모르겠다. 영우가 좌절하면 내가 대신 책임져야 할 것만 같아서. 프롬은 선택과 참여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한탄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사르트르는 좋은 상황이든, 좋지 않은 상황이든, 모순적 선택의 한계상황이든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인 인간으로서 선택하고 참여하고 책임을 지는 ‘살아 있는 삶’을 ‘실존’이라 불렀다.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끌어안는다.
그의 개체적 자아는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더 강해지고 단단해진다. 자아는 활동적인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발생하면 상황 정의라는 것을 한다. 윌리엄 토마스는 인간은 시시각각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의하고, 그 정의에 비추어서 선택하고 참여하고 책임을 ‘지거나 회피하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좌절의 상황을 있을 수도 없는 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정의하는 순간 더 쓰디 쓴 좌절을 맛보게 된다. 좌절은 나만 부당하게 당하는 고통이 아니다. 좌절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살아 있는 모두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므로 거기에서 내가 예외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로또에 당첨될 확률보다도 더 희박한 기적을 바라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한번 겪은 좌절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원인 파악을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좌절의 원인으로 지목된 대상, 즉 나 혹은 남, 세상 혹은 상황 탓을 하게 된다. 이것보다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일이 있을까. 관계를 해치는 것이 있을까.


 그렇다고 그 좌절 앞에서 있는 힘껏 슬퍼하고, 분노하고, 절망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해야 지금의 답답한 마음에 작은 창이라도 낼 수 있다. 그 모든 감정적 상태를 고스란히 겪은 후 그를 또 다른 욕망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 좌절을 좌절인 채로 두지 않는 방법이다. 때로는 차선의 욕구가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좌절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좌절을 어떤 프레임 안에 놓아둘지는 결정할 수 있다. 자발적 활동의 주체로서, 즉 어른으로서 우리는 좌절의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좌절의 상황의 때에 내가 그것을 얼마나 원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또 절망하는 것에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 다른 욕망과 욕심과 욕구를 확인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는 것이 프롬이 말한 대로의 활동적인 자아 즉 강한 자아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아기였을 때,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하였다. 우리 모두는 탐험가로 태어났었다. 단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을 것이며, 온 집안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높은 의자에 자꾸만 기어 올라갔고, 휴지를 모두 뽑아 놓았으며, 서랍이란 서랍은 다 뒤졌을 것이다. 그러다 혼이 나도 혼났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서 또 똑같은 일들을 반복했을 것이다. 앞에 장애물이 나타나더라도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도 안 되면 목청껏 울음으로써 나의 욕구를 주장했을 것이다. 자유로웠던 아기에서 제한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얼핏 보면 슬플 수도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감각적 쾌락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 책임지는 상황을 홀로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사실 앞에 인간은 고독감과 무기력을 느낄 수도 있다. 커가면서 염치라는 것도 생기고, 눈치라는 것도 생기면서 우리는 적당히 세상과 환경과 주변인들과 타협하게 된다. 그리고 부모가 대신 책임져주던 상황에서 드디어 내가 스스로에 대해 책임지는 ‘실존’의 삶을 살게 된다. 무기력을 호소하는 무수한 내담자들을 만난다. 무기력이라는 것은 우울함이 누적되고 장기화된 것이다. 내적 생산성에서 야기되는 성취로서의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이다. 


 프롬은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생산적 에너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정신병에 걸리고 불행해진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생산적으로 살아가는 데 실패한 데서 노이로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프롬에 의하면, 인간은 돈이나 명성 혹은 권력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전개시킬 경우에만 행복할 수 있다. 좌절을 만난 이후에도 행복을 위해 생산적 능력을 발휘하려면 좌절을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


 이상하지만 이상하지 않았던 우영우는 좌절에 대해 편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섰을 때 너무나도 평온히 다른 길을 찾는 네비게이션을 우리는 가끔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네비게이션처럼 기대한 것이 틀어졌을 때 평온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른 대안은 찾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좌절된 자기를 희생자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먼저이다. 희생자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가치 판단이 이미 내재되어 있으므로 조금 더 중립적인 좌절의 ‘경험자’로 자기를 개념 정의한다면 좌절 앞에서 조금 더 건강한 그리고 적절한 대응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