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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Dec 29. 2023

긍정과 부정의 허망한 이념으로서의 감정

우리 자신의 것인 감정에 충실하기

“진짜 감정은 자기 자신 속에서 생겨나지만,

가짜 감정은 우리가 아무리 자신의 감정이라고 믿더라도

사실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프롬은 현대인이 느끼는 감정의 허위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가짜 감정이 진짜 감정을 대체할 때 결국 가짜 자아가 본래의 자아를 대체하게 된다. 가짜 자아란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원시적 자아의 상실 때문에 가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대체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데다가 다른 사람의 기대를 실현해야만 자신의 가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불안과 자기 의심에 빠지게 된다. 가짜 자아로 인해 정체성이 상실되면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타인의 승인과 인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웃고 이야기하고 떠들다가 자리를 나가는 순간 허무해지고, 불안해지고, 활기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혼자가 되는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다. 모임에서 실수한 것은 없었을까,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은 아닐까 불안이 올라오고, 자신이 주고 싶은 인상을 주지 못했을까 봐 두렵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 적당히 웃었으며, 힘든 이야기라도 하면 부정적인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니 애써 쾌활하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에는 선을 넘는 친구 때문에 불쾌함이 밀려오고 화도 났지만 모임의 분위기를 해칠까 봐 애써 감정을 눌렀다. 괜히 참았나 자책감도 느껴진다. 그리고 모임의 문을 나가면 다시 고독의 상태를 마주해야 한다. 


 모임에서 보인 쾌활함은 진짜 감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진짜 감정이었다고 할지라도 무수한 다른 감정들은 쾌활함에 묻힌 나머지 쾌활함이 지나고 나서야 드러났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자기검열을 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묻혔던 감정도 자유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통칭하는 정서는 너무나 인간적인 것임에도 정의나 윤리적 문제처럼 교정되고 치료되어야 하는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우울하고 불안한 사람이 상담이나 정신과적 치료를 거부하면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그리하여 개인은 특정한 상황에서 자기가 느껴야 하는 감정을 느끼는 데 익숙하고,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리는 것이 보통의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예외적인 상황이 된다. 그래서 모임에서 우리가 느낀 쾌활함이 진짜 감정이 아니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프롬은 가짜 감정의 가면을 쓰게 되면 자아 속의 진짜 감정을 감춤으로써 우리의 처지가 온통 불안해진다고 한다. 마치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이중스파이처럼 말이다.  

    

“감정적인 것이 불안정하거나 정신적으로 불균형한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렸다. 이 기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인은 매우 약해졌다. 그의 생각은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졌다. 한편 감정은 완전히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인격의 지적인 측면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 결과는 값싸고 가식적인 감상성인데, 이 감상성을 가지고 영화와 대중가요는 감정에 굶주린 수백만 명의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불안과 두려움, 낙담과 절망, 슬픔과 우울 등은 불행의 언어가 되었다. 현대 문명에서 이러한 감정을 부정적이라고 일컫는 것을 넘어 치료의 대상인 정신병으로까지 진단하는 것은 사회·정치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감정을 낙인찍고 단순히 장애와 질병으로 몰아세워 그 책임을 개인의 정신 상태로 돌리려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 구조의 불의와 병폐를 숨길 수 있다. 


 살아있는 실체로서 느끼는 고통과 결핍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어놓는 일이다. 인간은 고통과 결핍을 통해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품격과 존엄성을 자각하기도 한다. 즉, 세계 내 인간은 구축해왔던 정신세계가 흔들릴 때 나와 고유한 관계,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정신적인 품위를 지니고 고통과 결핍에 머물 때 비로소 내면으로부터 유래한 용기와 의지를 마주하게 되고 행복의 의미를 확장하게 된다. 긍정과 부정의 허망한 이념으로서의 감정의 개념화에서 자유하게 되고 행복한 인간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울증에 걸린 자신을 인생의 패배자라고 여기는 데서도 자유해질 수 있다.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상담실을 찾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어 하는 것 중 하나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최근 만난 30대 내담자는 이전까지 자신감 하나로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자신이 규정한)에 부딪히자 온 정신이 무너졌다. 사람들을 만나기를 좋아했고, 활달했지만 모든 이들과 연락을 끊었고, 고립되었다. 공황장애, 수면장애, 우울장애, 불안장애 진단을 받고서 정신과 약을 먹었고, 나와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 20회기를 만났다. 그는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 괴로웠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결코 망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체험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서 무엇이든 알아서 하는 아이였고, 청소년을 지나 성인이 되면서도 모든 길을 개척해나갔다. 회사에서도 유능한 인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를 칭송하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진취적인 자기도 감춰졌다. 감춰졌다고 하는 것은 그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여전히 잠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한 것을 통해 그가 왜 이토록 무너졌는지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꽤 자주 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에 못지 않게 학교에 가기 싫어지기도 한다. 어른들도 회사에 마지 못해 갈 때가 많은 것처럼 아이 또한 학교가 좋다는 느낌도 들지만 학교의 규칙적 억압에 염증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억압으로 인해 허락된 감정만을 표현하기도 하고 진짜 감정은 억누르기도 한다. 프롬은 여기에서 아이가 학교에 가고 싶을 때도 있고 가기 싫을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아이는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의무감의 압박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이는 남들이 기대하는 바를 ‘그 자신’이 원한다고 느낀다.


 앞서 소개한 내담자도 회사에서 유능한 인재였지만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어떤 날은 징징거리고도 싶을 정도로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유능한 인재로서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므로 그는 기대하는 혹은 기대된 자기로만 살았다. 무엇보다 그는 어른에게 의지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 그 속에서 어떤 나는 감춰졌을 것이며, 또 어떤 감정은 억압했을 것이다. 그가 무너진 것은 감춰졌던 나와, 억압했던 감정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너짐은 무너짐이 아니라, 진짜 나로 살 수 있는 기회이자, 진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이며 실존적 자기를 되찾는 길이다. 


 타인들로부터 기대되었던 자기, 스스로 이상화했던 자기에서 탈피하여 여러 모습의 나를 인정하고 승인함으로써 비로소 페르소나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치유는 못났다고 생각하여 내면의 보이지 않는 곳에 방치하고 숨겨두었던 모습을 만나면서부터 일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억울함, 원망, 슬픔, 불안 등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자유해졌다. 그러고서 정신과에서 처방받았던 약들을 끊게 되었다. 


그는 근대인이 느끼는 습관적인 불안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진
상당히 정상적인 개인이다    

  나의 내담자였던 이에게도 혹독한 시절을 살아가는 당신에게도 프롬의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불안하고 인정받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당신은 신경증 환자도 아니며 최면술에 걸린 상태도 아니라고. 정서적 불안정을 진단의 영역으로 묶어 온갖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며 오히려 정서적 불안정은 인간적인 조건에 속한다. 오늘 흔들리는 나를 만난다는 것은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정상적 요청이자, 익숙했던 세계와 구축되었던 사고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자기 체계를 형성하고 자기 해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낯섦에 대한 역동적 자기반응을 통해서 문득 다가온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사유할 수 있다면 나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고, 과거 어느 때의 나를 치유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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