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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Jan 05. 2024

한계와 고통의 도피로서의 중독

자유에서 도피의 세계로

“자발성이 방해받은 결과로 생겨난 동시에 

자발성을 방해하는 원인인 이 의존성은 

상당한 안전감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나약하고 속박되어 있다는 느낌도 낳는다”     


 단 한 번도 충족된 적 없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가 되면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지, 기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흥분을 행복이나 기쁨으로 착각한다. 외부의 것들로부터 얻는 즉각적인 만족감은 내면의 고통을 가리고 우리를 방황하게 만든다. 살아오면서 종종 마주했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거나 가르쳐주는 이가 있었다면 그것이 앞으로 오게 될 고통 감내에 대한 근거자료로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홀로 찾는 것은 불안할 뿐만 아니라 함께 찾을 때보다 더 고통스럽다. 


 상담실을 찾는 대부분의 내담자들은 고통을 계속해서 혼자서 삼킨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혼자서 해결하려고 한다. 주변에 들어주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기 일쑤이다. 자기만의 건강한 해결방식을 찾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고통에 대한 감내력이 떨어지거나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은 의존할 무언가를 찾아 고통의 해결을 시도하기도 한다. 


 심지어 손가락 하나로도 간략하게 우리는 그 의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SNS 세상에, 도박의 세계에, 마약의 굴레에 쉽게 빠져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외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루종일 인터넷 세상에 연결되어야만 하는 사람들, 언제가 오게 될지도 모르는 행운에 집착하는 사람들, 단 한 번의 쾌감의 순간을 잊지 못해 끊임없이 그때의 쾌감을 갈구하게 되는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불명확한 대상에 현혹되지 않는다.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알았다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의 내면을 바라봐 준 사람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나의 내면에 궁금증을 갖기 시작하는 건 누군가 자기의 내면을 궁금해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모든 고민은 대학 간 후에 다 해결된다는 달콤한 말을 믿고서, 나조차도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럴 만한 겨를이 있긴 있었을까. 혹시 모든 고민은 대학 진학 후로 미뤄지진 않았던가. 나의 진로가 부모의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정해지지 않고, 나의 재능과 꿈에 의해 정해졌는지, 내가 원했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정말로 내가 원한 것이 맞는지를 점검해봐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과, 좌절되는 것을 살뜰히 물어봐 주고 알아봐 주던 사람이 곁에 있었던지를. 


 그런 다음, 지금에 하고 있는 공부와 일과 여가활동들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된다면, 내가 진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것을 할 때 진정으로 몰입할 수 있는지, 누군가에 의해 오염되기 전의 나의 꿈은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해내고, 알아내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떨 때 불안감을 느끼는지, 내가 어떤 것을 할 때 진짜 즐거운지 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면 알수록 불안감에서 해방되고, 그것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알 수 있다. 미지로서의 자기는 불안의 근거이기 때문에 진짜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조차도 자기로부터 소외시켜 버린다. 자기가 자기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상태가 바로 중독이다. 중요한 타인들에게서 잊혀지고 결국 자기도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지 않나. 


 대상관계이론가들에 따르면 중독은 자기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 자기 자신이 나쁘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해 준다고 한다. 즉 중독은 괜찮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고통으로부터 탈출을 돕는 기능을 한다. 왜 무엇에 빠지면서까지 괜찮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못 본 체 하고 싶은 걸까. 그리고 괜찮지 않은 모습은 정말 괜찮지 않은 모습이 맞을까. 괜찮지 않은 모습은 외부에 의해서 판단이 먼저 이루어진 후 자기에게로 재내면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자신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다  

 한 자기애적 성격장애를 갖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는 사랑을 갈구했지만,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와 또 자신을 두고서 재혼한 어머니 사이에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그는 어른이 되어 드디어 결혼을 했지만 아내마저도 자신을 떠났다. 그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듯 자위중독에 빠졌고, 자위중독에 빠진 자신을 혐오하였다. 그에게 자위란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은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행위였지만, 동시에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았던 주체들과 동일한 자리에 앉아 자기를 미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연인을 만들어 SNS에 올렸다. 결국 그는 더 비참함을 느꼈다. 항상 자신의 힘을 과시했지만, 누구보다 자기의 약함을 알고 있었고 타인에게 그것을 들킬까 염려하였다. 


 다수의 경계선 성격장애를 갖고 있는 내담자들에게서도 중독의 문제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경계선 성격장애도 자기애성 성격장애와 마찬가지로 애착 손상의 문제가 커서 상대방을 끊임없이 조종하고 통제함으로써 사랑을 채우려는 특성이 있다. 이렇듯 내면에 애착의 구멍이 크게 생긴 사람들은 자신을 위안할 대상을 외부에서 찾아나서지만, 나중에는 그 행위만이 지독히 살아남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나가게 만든다.


 어느 날 갑자기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던 연예인들이 마약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대중은 그에 실망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마약 중독의 문제가 사회문제로 번지고 있으며, 상담실에도 각종 중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마약이 인간의 쾌락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약을 위해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진짜 자기 모습으로 관심받고 사랑받는 대신 만들어진 이미지 혹은 가짜 자기로 사랑받아온 데에 따른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근대인은 전통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개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고독해졌고 무력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타인들로부터 소외되어 자기 바깥에 있는 목적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 더욱이 이 상태는 자아를 은밀하게 해치고, 그를 약화시키고 위협하여 새로운 종류의 속박에 기꺼이 복종하게 한다”     


 프롬은 속박으로의 해방이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기를 당부한다. 자아를 은밀하게 해치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해치는 자아는 가장 연약하고, 상처받아온 모습 그래서 부정당한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존재 그대로 사랑받아본 적 있는 사람은 자기의 싫은 모습까지도 자기 안으로 통합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의 체온이 온몸에 남아서 돌고 돌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고통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바스러지는 대신 처량한 내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나에 대한 연민의 정이다. 모든 이들이 때로는 지질하고, 때로는 열등감에 휩싸이고, 때로는 외롭고, 또 때로는 처절하다. 우리는 살아 있기에 사람 속에서 존재성를 증명하고 싶고, 관심받고 싶기에 그 증명이 좌절되었을 땐 아프다. 그래서 나중에는 존재가 아닌 물질이나 대체재를 찾고, 결국 더 큰 소외 가운데에 유배된다. 


 우리가 사랑받지 못함은, 애착에 큰 결손이 생김은 나의 못난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를 주어야 할 대상의 모자람에서 비롯된 것일 확률이 크다. 중요 타인이 나에게 사랑을 줄 준비가 되지 않았었고, 그가 분주했었고, 그가 자기 안에 갇힌 채 소중한 존재를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열등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나를 즐겁게 하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사람들 한가운데 두어야 한다. 이미 태어난 기쁨은 나를 알아가고,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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