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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Dec 22. 2023

왜 우리는 전문가를 추종하는가

전문가라는 절대적인 권위에 기대어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

낯설고 강력한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똑바로 알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확신이 가득 찬 전문가 한 사람이 나온다. 둘도 많다. 여러 전문가에게 나누어줄 출연료가 모자르기 때문인지,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충돌될 때 대중들의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인지 방송국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우리는 가장 권위있는 자라고 여겨지는 한 사람의 전문가를 대한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들은 비정상적인 아이가 되고 천하의 몹쓸 자식도 된다. 그걸 보는 사람들은 역시 아이는 안 낳고 안 키우는 게 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부터 각각의 예능 프로그램들에서 정신과 의사들이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 육아 프로그램과 심지어 연애 프로그램에도 정신과 전문의들이 나와서 썰을 보탠다. 더 큰 문제는 한 사람의 전문가가 이 방송, 저 방송에서 모든 판단을 내린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참 기이한 현상처럼 느껴지지만, 대중들은 이에 별 의의를 제기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전문가가 나와서 대중의 불확실한 의견에 대한 불완전성과 불안을 해결해주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어떤 임상과 지식은 모든 경험을 능가하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그렇다”로 대답하지 않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육아의 신은 육아를 많이 해 본 사람이고, 연애의 신은 연애를 많이 해 본 사람일 수 있다는 얘기다. 때로는 우리의 지식은 허망하고, 그 지식을 일상에 적용하는 우리의 인내는 더 초하래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롬이 말한대로 지적으로만이 아닌 물리적으로 세상을 파악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 역시 경험이 가장 큰 권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정신과 전문의를 육아의 고수, 연애의 고수로 생각하면서 그가 하는 말들에 안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일까. 심지어 그 중에는 육아를 해 보지도, 연애를 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도 있을 텐데 말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심리 전문가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생물학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모든 케이스에 적용할 방대한 임상 경험이 단 한 사람에게 있지도 않을 것인데. 육아 프로그램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필요한 시점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나 그 가족에게 정신과적 질병이 있거나 소견이 있을 때 뿐이다. 연애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연애 프로그램에 굳이 정신과적 질환을 보이는 사람을 출연시킬 방송 관계자는 없을 것이므로 정신과적 지식은 더더욱 필요치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예능의 현주소를 프롬은 마치 벌써부터 예견이나 한 것마냥 확실한 해답을 준다. 시청자들이 이렇게까지 전문가라는 이름에 의지하는 이유는 사실을 많이 알수록 현실도 잘 알 수 있다는 한심한 미신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인은 엄청나게 많은 자료 안에서 혼란을 느끼고 무력해지기 때문에 전문가가 자료들을 종합하여 해석해주기를 기다린다. 즉 한 분야의 전문가는 그 분야의 전문가일 뿐 인생 전반의 전문가가 아님에도 그가 가진 배경에 모든 걸 맡겨버리는 것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후광효과(자기 전공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모든 분야의 권위자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사회적 지각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정도로 설명되기도 한다. 


 프롬에 의하면 이러한 영향력이 낳는 결과 중 하나는 모든 말이나 글에 대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권위자의 말이라면 어린애처럼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개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을 방해받는 귀결로 전개된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비판적인 사고와 의견 교환이 차단되면 차단될수록 드러나 있는 전문가 한 사람에게 절대 다수의 사람이 의존하기란 더 쉽고 그에 대한 검증은 더 어렵다. 


 우리가 믿고 의존하는 전문가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해당 분야 모든 지식은 이후에 발생하는 사건과 상황들, 새로운 학설과 이론들로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전제하에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동시에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자신의 한계를 수긍하고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인정하는 것이 타 분야 전문가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이다. 하지만 전문가들도 인정에 따른 권위의 훼손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문가들도 자신들의 쓸모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일 것이므로.     


사실들은 구조화된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만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자질을 잃고, 단지 추상적이고 양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다.
각각의 사실은 ‘또 하나의’ 사실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는 사실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뿐이다    


 진로에 대한 선택과 갈등 상태에 있는 청년층의 질문들에서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야 하느냐, 잘 하는 것을 선택해야 하느냐’이다. 그 앞에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 사람들 역시 하나의 해답을 내려주기 위해 애쓴다. 프롬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과 사실은 의외로 너무나 간단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를 오직 ‘전문가’만 이해할 수 있고, 게다가 전문가조차도 한정된 것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제를 복잡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고능력을 믿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우리가 마주한 세계를 이렇게 이분법적이고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독창성과 개성을 말살하는 것도 없다. 세계 내 개인은 복잡하고 은밀하다. 적어도 개인에게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내린 결정이 맞는 것이므로 굳이 타인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내 생각에 확신이 있을 만큼 내가 얻는 정보와도 친하지 않고, 나 자신과도 친하지 않으니 타인을 통해서 해답을 자꾸만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여 사회에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선택의 굴레에 처하게 된다. 20대의 선택은 그래도 부모에게 의지해볼 만했다. 30대가 되어서의 선택은 조금 더 무겁다. 프롬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산발적으로 주입된 사실들로 인해 학생들은 점점 더 많은 사실들을 배우는 데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고 그로 인해 생각할 짬이 없어진다. 물론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허구적이지만, ‘정보’만으로는 정보가 없는 것만큼이나 생각에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교육이 시작될 때부터 학생들의 독창적인 생각은 억압되고 기성품과도 같은 생각들이 주입된다. 정보 너머의 독창적 사고를 해 본 적 없는 학생들은 어른이 된 이후에도 이를 극복할 수 없다. 


 불안이 극심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독창적인 사고와 행동이 또 다른 불안의 요소로 작용한다. 남들과 비슷한 사고와 행동을 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을 바깥 세상에서 안쪽의 세상으로 인도해주는 것만 같다. 항상 진실을 탐구하고 발견한 사람들이 인류 사상의 선구자들이었음에도. 하지만 누군가 진실을 발견하고 추구하려고 하면 일부에서는 그를 뒤떨어졌다고 말한다. 프롬은 진실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문제이자 거의 취향의 문제로 취급된다고 경고한다. 그 끝은 생각하는 사람의 관심과 소망이라는 생각의 본질을 상실하는 것이며, 생각이 ‘사실’을 기록하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가끔 상담실을 찾는 내담자 중에서도 상담사가 해답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본인이 원하고 있는 대답을 상담사가 줄 때까지 같은 질문을 또 하고 또 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확증해주어야만 비로소 안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이 믿든, 믿지 못하든 해답은 이미 내담자들 안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몇몇 내담자들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상담사에게 매달린다. 그럴수록 치료는 더 늦춰진다.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에 있음에도 무엇을 얻기까지 고민하고 고뇌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지난한 과정이 인내심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는 무리한 과업이 되어버렸다. 


 삶은 무수한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길 위에서 주은 조각의 의미는 다음의 조각을 주울 때까지는 알 수 없다. 각각의 조각들이 어떻게 합쳐지고, 어떤 삶을 보여줄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조각 하나만 놓고 보면 어리둥절해지고 두려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 그림의 의미를 알기 위해 하나의 조각만을 부등켜안는 대신 다음의 조각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물론 조각의 크기와 의미는 각 개인마다 모두 다를 것이며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건 종국의 나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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